그러므로 우리가 베드로를 배신자로 보고, 배신한 행위를 돌이키고 예수님을 위해 순교까지 하는 사도가 되었다는 식의 관점은 드라마를 보듯이 성경을 보는 것이며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신앙의 안목일 뿐, 성령으로 깨닫고 성경을 보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어떤 사람으로 보느냐? 베드로가 무엇을 배신했고, 우리가 배신으로 아는 베드로의 배신은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베드로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율법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한 결정적인 것은 베드로의 신앙과 배신을 재조명할 수 있는 안목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하신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의 임하심 없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낮고 천한 그리스도를 인정하거나 믿을 수 없으며, 베드로를 바로 볼 수도 없습니다.

 

베드로를 배신하고 자기 <행위>를 돌이킨 사람으로 본다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

 

우리의 신앙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모든 곳에서 같은 반응을 보이며, 모든 것을 같은 안목으로 보입니다. 고양이는 원양어선 위에서도 ‘야옹’이라고 하고, 양은 어떤 순간에도 고기를 먹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원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얻고, 거듭났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오직 그 생명의 안목 하나로만 봐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입니다. 십일조는 의미로 생각하지만, 예배는 행위로 와서 앉아 있어야 한다는 식의 이중적인 안목은 생명의 본성을 벗어난 것입니다. 냉정하게 말해 생명이 아니며,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다는 것은 거듭남, 곧 구원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배신 행위에 관한 안목이 부족하다고 구원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베드로의 배신은 행위 그 자체가 쟁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들었다면 그걸 이해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걸 듣고도 “성경을 그렇게까지 보는 건 너무 나간 것이다 “라고 하고선, “오늘날과 같은 예배 형식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데, 그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건 죄를 범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이중적인 잣대는 그냥 상식적이지 조차 않은 것입니다.

 

그간 배신했지만 그 <행위>를 뉘우치고 예수님을 섬겼던 것으로만 조명했던 베드로에 관한 안목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부끄러운 배신이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정말로 중요한 고민의 해결 과정에서 겪은 갈등입니다. 우리도 그 갈등을 겪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 이상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내 사업을 번창시키며, 자녀의 성공을 담보하며, 내 육신의 건강을 안위하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 능력과 긍휼과 사랑을 의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건 베드로의 배신을 보며 타산지석을 삼는 게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아는 것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낮을수도, 천할수도 없는 십자가를 지는 사형수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보이신 예수님입니다. 낮고 천한, 그래서 육신으로 남을 섬기는 모두가 터부시하는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서 가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며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신앙으로 거듭나는 게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구원 안에 있다면, 파란만장한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알기 위한 순례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배신은 그 순례의 길에서 겪은,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모습이지 자기 살자고 스승을 배신한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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