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장) 욥의 탄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5. 23:42 Writer : 김홍덕

욥기 3장이 시작되면서 먼저 욥의 탄식이 나옵니다. 졸지에 전 재산과 자식을 잃고, 아내는 저주하고 떠나고 혼자된 것도 말 그대로 죽을 지경인데, 온 몸은 악창이 나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상황인 자기 자신을 한탄하면서 자신이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이 겪고 있는 이 고난은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동일하게 겪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일이라 그보다 더한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욥이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한 개인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이 주는 곤고함을 스스로 돌아볼 때 나지 않은 것 보다는 못하다고 느끼는 것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오늘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인생은 곤고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는 것에서 일단 태어나기만 하면 인생은 곤고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정도의 차이는 크게 다를 수 있지만 살아간다는 것을 곤고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평안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누구나 말은 하지 않더라도 태어나지 않은 것이 태어나서 곤고함을 겪는 것보다는 나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에서 투구나 욥의 한탄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을 이겨낸 다음에 누리는 복락을 자신의 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고난의 정도가 중요합니다. 욥이 가진 인생의 풍요로움과 하나님의 의는 비례한다고 여기는 가치관이니 당연히 큰 고난은 큰 보상이 따른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고난이 크면 복도 크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본다는 것은 사탄의 관점과 동일한 관점입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은 고난 자체보다도 고난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10월을 훔치나 10억을 훔치나 도둑질한 것은 같은 것입니다. 물론 비유가 과하긴 하지만 성경은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가지 율법을 다 지켜도 단 한 가지를 범하면 모두를 범한 것과 같다고 하심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자기 인생에서 겪는 곤고함을 어떤 의미로 받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육신의 평안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나은 인생을 추구하고, 더 나은 평안을 추구하고, 육신이 살아가나는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태어나서 사는 것 자체가 불만이란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고난은 추구하는 것에 대한 저항과 불만족이 고난의 본질입니다.


또한 그 바라는 것을 전혀 중요하게 보시지 않는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 구하고, 자기의 바라는 바가 얼마나 이루어지는지를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의롭게 여기는지의 척도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자신을 정죄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더 열심히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야 한다는 명분과 동력으로 삼는 악순환에 매몰됩니다.


바로 그런 모든 가치관과 노력의 뿌리에는 욥의 탄식이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욥의 탄식이 있는 것입니다. 사탄과, 세 친구와, 또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행위 = 의로움 = 축복>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욥은 자신에게 임한 고난은 자기 행위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태어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겪는 것 보다는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 좋았을 것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이러한 관점은 엘리후의 책망이 나오기까지 세 친구와 평행선을 걷습니다. 세 친구는 욥의 고난은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까닭 없이 자신에게 이런 고난을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점이 다르다보니 대화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사실 앞선 포스트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욥이 당하는 고난은 이 글에서 계속 언급하고 있는 육신의 평안을 축복으로, 또 의로움의 보상으로 생각하는 사탄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견주거나 빗댈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욥은 엄연히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지금의 신앙인들은 사람의 일이 잘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같은 수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욥이 고난을 보는 관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서부터 하나님 앞에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신앙과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사실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점입니다. 인생을 나지 않는 것이 태어나서 겪는 고난을 하나님이 감찰하여 주시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같다는 것입니다. 단지 고난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여기는 거듭나서도 태어난 것이 오히려 감사한 지경에 이르는 것에 이르는 것은 또 다른 신앙의 여정인 것입니다. 욥기가 말씀하시는 핵심 중의 핵심이 바로 그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그 수고로움을 십자가의 삶으로 알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인생에게 그것이 가장 가벼운 짐으로 알며, 태어났다는 것이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감사함으로 아는 신앙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육신의 풍요함을 하나님의 복으로 알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곤고함과 세상에서의 실패는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없는지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사탄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이 자기 삶이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인생의 풍족함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진 이들에게 고난은 오직 채찍질로만 여겨질 것입니다. 인생 자체와 고난을 연결하여 묵상할 이유나 여력도 없습니다. 곤고하다 싶으면 어떻게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기도를 하든, 성경을 보든 아니면 굿을 하든 뭐라도 해야 한다고만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욥은 달랐습니다. 자기가 행위를 달리 한다고 하나님께서 그 뜻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이 행위로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를 고친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 친구들은 그 욥의 말을 꺾어 보려고 긴 변론을 하지만. 그렇게 보면 적어도 고난의 의미를 논하려면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 고난의 크기가 어느 정도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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