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는 성경의 분류에서 시가서에 속하고 소설과 같은 것이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다분히 역사학적으로 욥이라는 사람의 실존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일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객관적 실체인지를 따지는 사람들의 안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심청전을 읽고서 효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심청이란 사람이 없으니 그것은 소설이고, 문학적 가치는 어떻고를 따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도 그렇게 믿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성경을 문자대로 보는 것입니다. 행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록하신 의도는 무시하고 표현된 것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기는 문학적 관점이나 역사적 사실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소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욥기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더더욱 욥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겪는 여정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책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재산과 자식들을 다 잃어야 한다는 말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앞서서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했음에도 말입니다. 그런 질문이 생각난다면 아마도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생명의 안목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욥은 한 마디로 졸지에 폭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자신의 잘못을 인함이 아닙니다. 특별히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잘못된 <행위>를 저질러서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복과 은혜는 육신의 풍요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면 육신의 풍요를 누리게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가치관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달리 사탄의 생각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니 욥이 폭삭 망한 것입니다. 그렇게 욥기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는 사업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교회에 가야 한다.’, ‘절에 가야 한다.’ ‘점집에 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DO)를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육신이 추구하는 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은 그 육신의 행위가 신 앞에서 올바른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신적 존재에게 무엇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 묻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그것은 하나의 가치관입니다. 육신과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판단하는 가치관입니다. 교회를 크고 잘 지었다고 하면 교회가 발전했다고 하는 것이 그렇고, 인생이 풍요로우면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하고,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이루어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바로 그 가치관입니다.


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자기가 귀하게 여기는 그 세상의 가치 있는 것들을 얻으려고 합니다. 믿음을 드린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부터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거나 신앙생활을 잘해서, 아니면 노숙자에게 교회의 이름으로 밥을 제공하는 봉사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서 하나님이 그 보답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잘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또 세상 사람들이 잘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들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을 보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고 하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회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신이나 신앙보다 하나님이 더 잘 들어주시며, 사람이 구하는 모든 것을 지은 분인데 그 하나님께 구하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런 말과 생각들이 욥기에 줄줄이 널려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하는 말들이 바로 그런 말이고, 그 시작은 다름 아닌 사탄입니다. 욥의 의로움이 욥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앞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 일이 잘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과 사탄의 생각은 정확히 궤를 같이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욥의 신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욥은 엘리후가 책망을 하고, 하나님께서 질문 공세를 하시기 전에도 적어도 사탄이나 세 친구와 같이 하나님 앞에 어떤 행위를 잘못해서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어떤 것을 의로 여기시지도 않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풍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의롭다고 하신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욥은 오늘날 세상에서의 평안과 영광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하여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려고 하는 사람들과는 격이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세상이 귀하게 여기고 육신을 평안하게 하는 것을 구하는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고난을 이기면 그것을 주실 것이라고 빗댈 수준의 대상은 사실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기를 통하여 단지 그것만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아닙니다. 행위로 의로워지거나 육신의 어떠함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만을 말씀하시고자 함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엘리후의 변론과 하나님의 질문, 그리고 욥의 회개 과정에서 육신의 정욕을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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