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를 야곱의 자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세상의 가치관을 취한 사람들을 사마리아와 같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야곱의 수치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과 신앙을 혼합한 신앙관을 가지는 것을 사마리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국 사람에게 숫자 4가 한자로 죽음을 의미하는 ‘사(死)’와 발음이 같은 이유로 죽음을 상징하듯.


그리고 미가서의 전반부에서 그런 신앙의 병폐를 고발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신앙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신앙을 버린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나온 아기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이를 <야곱의 남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난 아기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로 대변되는 신앙의 간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크고 위대해지는 것을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관이 혼합된 것인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낮아짐과 섬김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자기 모습을 버리고, 오히려 인생이란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과 같이 자기 육신을 소비는 종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육신 가진 인생을 주심이 자기 생명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기에 베들레헴에서 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크고 위대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하는 느므롯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또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마음을 물리치게 할 것이라고 미가 선지자가 예언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므롯은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하늘에 오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 자체가 아니라 노력하고 가공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한다는 사람들이 바로 니므롯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서 난 아기, 즉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그런 것을 다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고찰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높아지려는 마음을 자신이 다스리며, 절제하고 극기하듯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도원이나 신부나 수녀와 같이 자기 의지로 높아지려는 것을 이겨내는 <노력>과 <수고>로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노력과 수고가 바로 흙을 벽돌로 만들기 위하여 짚을 넣고 불에 굽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아주 어두운데, 자기 의지와 신념으로, 또 기도하고 부르짖어서 자신 안에 있는 높아지려는 마음을 이기는 것이 아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한 아기가 났다고 말씀하신 것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아기가 나는 것은 신념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남녀가 결혼을 하고 출산을 위한 수고야 하지만 그것은 육신이 하나님이 주신 본성에 순종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부모도 그 아이의 머리카락 하나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부모들의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우리가 다 압니다. 그게 바로 수고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 생명에 관한 신앙을 믿으면서 수고와 노력으로 믿습니다. 기도해야 마음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면 그것은 이긴 것이 아닙니다. 단지 기도에 종속된 결과일 뿐이지 자기 안에 그 유혹을 이길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 하지 않으면 큰 일 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높아질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는 그렇지 않아서 자기 안에 어떤 것이 들어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들을 때에 그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육신을 가진 내가 살아야 할 모습이구나!’라고 고백할 때에 성령께서 속에 들어온 예수님의 모습이 생명으로 잉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이 육신의 삶의 본성이 되어 그 본성으로 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라는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 그것이고, 그것이 바로 아들이라는 정체성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로 나타난 의가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이 그 정체성을 부인하려해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 부모의 유전자가 아무리 싫어도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아들로 나기만 하면 낮아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묵상하고 할 필요가 없고, 죄를 지을까 하여 산에 들어가 수도승과 같이 살 이유도 없고, 결혼을 금하여 신부가 수녀가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사람들은 좋은 신앙이라 여기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상할까 하여 따로 모여 살거나, 사람들이 죄를 짓는 모습을 보고 원천적으로 육신을 그곳에서 분리하려 결혼을 금하고 또 노력하는 모든 것은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노릇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니므롯이 쌓은 바벨탑과 같이 육신의 삶에 가치관을 더하여 하늘에 이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야곱의 남은 자들, 곧 사마리아와 같이 수치를 버리고 여호와의 전에 오른 사람들은 여러 백성들 중에 거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여러 백성들 중에 거하면서 그 백성들 안에 있는 본성들을 이겨 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과 멀리하여야 좋은 신앙이라고 여깁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세상의 가치관과 자기 신념으로 이겨내려고 애쓰고 있고, 그 싸움을 이기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빌리려 신앙생활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세계에 있으니 동화되지 않으려 멀리 떨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름이 불을 멀리하는 것과 같이.


그러나 야곱의 남은 자들, 베들레헴에서 난 아이와 같은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은 다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 되려고 해도 그 본성이 이미 그것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지키려 세상을 멀리하는 사람은 양의 탈을 쓴 늑대가 고기의 유혹을 물리치려 멀리 떨어지려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그것을 이기려 하지만, 양은 고기가 옆에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의 남은 자들은 여러 백성 중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을 가졌기에 세상 사람들과 스스로를 구분하는 것과는 근원이 다른 세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먹음에 있어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는 것을 먹으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짠 바다 속에 있지만 짜지 않은 고기와 같은 생명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바다 속에 있지만 비늘로 구분이 되고, 지느러미로 방향을 정하듯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방향성을 가진 생명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흔히 가진 생각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에서 자신을 멀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오히려 바벨탑을 쌓는 노력이고, 그 노력이 효율적이도록 사마리아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과 간음하듯 그 법을 도입하여 방법을 연구하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높아져서 교회의 높은 곳에, 사회적 높은 자리에 이르는 죄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신앙은 세상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과 하나가 되고, 세상의 가치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그런 것을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상을 이길 본성이 그 안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들이 자기 육신의 유전자가 아버지와 달라질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이 믿음이 없으니 그렇게 세상을 경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충만하면 할수록 세상 속에서 세상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과 의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드러날 때 더 영광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들은 그렇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거하여 니므롯과 같은 본성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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