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19. 12. 10. 05:00 Writer : 김홍덕


히브리서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먼저 저자가 누구인지를 이야기한다. 신약성경 중에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저자를 단정하기 어려운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히브리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히브리서는 많은 서신들이 가진 특정한 주제나 대상이 뚜렷하지 않은 책이지만 내용의 깊이는 상당한 말씀이다. 책 전체가 깊이 있는 설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큰 물을 건넜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인들을 위한 책이다. 그래서 오늘 진정으로 큰 물을 건넌 사람, 이전의 가치관 안에서 살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기로 거듭난(물을 건넌) 사람으로서, 또 그런 신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히브리서를 함께 나누어 보자.





하나님은 이제 아들로 말씀하신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들로 나타났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예수님 이전의 조상과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신 모든 것의 마지막이라고 말씀하면서 시작한다. (2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종식되고 이제는 아들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제(Now)’의 시점은 당연히 예수님이 오신 시점이다. 아들로 말씀하신다는 것은 아들 이전의 것이 끝나고 아들로서 모든 것을 말씀하시겠다는 것이다.

시간에 관한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듯 이 시점은 달력의 시간은 아니다. 각 개인이 하나님 아들로 거듭나면 그 사람의 관계가 이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시작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제'는 바로 그 시점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아들로 말씀하시겠다고 하셨다는 것은 아들 이전의 모든 것은 아들이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이고 도구며 수단이라는 말씀이다. 이는 바울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한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19)


이는 하나님 말씀은 궁극적으로 아들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포도원 주인의 비유(막 12장)에서 포도원을 맡기고 멀리 간 주인이 먼저 종들을 보내고 포도원을 경작하는 자들이 종들을 죽이자 아들을 보냈다고 하신 것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보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이긴 하지만 아들과는 그 정체성이 다름을 말씀이다.

이러한 말씀이 말씀의 형식으로 보면 예수님 오시기 전 시대적으로 먼저 선지자들이 오고 다음으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성경 말씀의 본질적 행간은 성경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선지자 시대의 신앙에서 아들의 신앙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그렇듯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지었다고 말씀하신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아들이라는 존재는 아버지의 의와 생명(눈에 보이지 않는)이 형상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 것이다. 아버지의 의가 아버지와 동일한 성품을 가진 형상으로 나타났을 때 그를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일컬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이라고 하신 것이 같은 것이다. 아들이라는 존재 정체성의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를 통하여 대언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타나심도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천사와 같은 이상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자 모든 것은 아들을 통해서 나타났다. 그것이 말씀이든 기적이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나왔다.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아들을 주관자로 세웠다는 것이다. 마치 왕의 왕관이 아들 왕자에게 양위된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부터 뜻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실 때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존재로 지으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사람이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로 삼기 위하여 창조하신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이시고 의의 본체이시기에 그 형상을 알 수 없고, 형상이 없으니 하나님의 성품을 가늠할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를 만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만물은 당연히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이라는 형상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도록 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존재가 볼 때에 하나님이라는 신의 성품과 의를 알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에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형상” 곧 Image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하신 바와 같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자기 육신의 삶으로 표현하면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예수님을 장자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므로 모든 하나님의 역사가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2)


이는 아들은 곧 하나님 영광의 광채이고 본체의 형상이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한 이유인 것이다. 아들이란 하나님 아버지의 의가 형상으로 나타났으니 그 아들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의에서 비롯된 것이고, 따라서 그 삶도 생명체가 유전자의 본성을 따라 살 듯 아버지의 본성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들이기에 아들은 아버지의 본체인 것이다. (히 1:3) 이는 바울사도가 빌립보서에서 말씀하신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또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바울사도도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결국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것이고, 그 모든 것의 완성은 아들, 즉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 이전의 모든 것은 아들로 말씀하시기까지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들은 하나님의 본체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들이 만물을 붙든다. (히 1:3)”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만물을 붙든다는 것은 만물의 존재 이유를 아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에 대한 존재 목적을 아들이 가지고 있기에 만물들이 자신의 목적 아래 통제 받고 순종하면서 아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법 안에서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이 만물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는데 아들이 나타난 이후로는 아들로 말씀하신다고 하였다. 이는 아들이라는 존재가 아버지의 의가 형상이 된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에서 시작하여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자체가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씀은 하셨는데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었느냐의 문제는 또 다른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께서 아들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아들로 말씀하시니 그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들으라는 것이다. 들을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데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히브리서 역시 읽고 듣는 이들에게 이제는 아들 이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듣는 것과는 다르게 아들로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라는 것이다. 선지자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함은 선지자들의 외침을 듣고서 그것을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라면 아들로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과 같이 듣는 사람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육신, 곧 자기 육신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들로 말씀하시는 이유고, 아들로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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