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3:18-21) 하나님이 주시는 복, 구원(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11. 10:48 Writer : 김홍덕

구원의 증거


신앙인들에게 구원은 일상이고 기본이자 절대적 요소이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지에 대해서 사실상 잘 알지 못하고, 구원 받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어쩌다 생각하면, 아니면 교회에 갔거나 문득 신앙적 환경에 처하거나 생각을 할 때 별다른 생각없이 그냥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거듭남과 새생명이다.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전화기만 새 것으로 바꾸어도 설레고 그 변화를 체감하며 사람들에게 자랑할 뿐 아니라 주변인도 전화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관심을 보인다. 전화기와 같은 소비재가 그런데 영혼의 운명이자 영원한 시간에 속한 문제인 구원을 받아 새생명이 되었는데 실감할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명이 바뀐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늘 비유하는 대로 늑대가 양으로 거듭났다고 해 보자. 새로 난 생명이 양이라는 것은 모양은 물론이고 살아가는 법, 곧 본성과 행동, 그 모든 것이 양이라는 의미다. 이제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는다. 아니 고기를 먹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고기는 삶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것이 양이다. 이런 변화를 바로 구원, 거듭남, 새생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믿어 구원 받아 거듭난 새생명이 되었다면 늑대가 양이 되는 것 이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 없다”는 찬송가 가사와 같은 삶이어야 비로소 구원을 논할 수 있다. 그런 변화 없이 단지 세례 문답으로,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문장을 인정하는 것으로 구원은 어림도 없다. 그리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 받을 기회조차 없다.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얻지 못한 구원을 찾을 리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자. 종교와 종파를 떠나서 그들이 신앙을 가지기 전이나 가진 다음이나 추구하는 것 동일하고, 가치 동일하고, 복에 대한 기준, 영광과 성공에 대한 기준 어느 하나 달라진 것 없이 동일하다. 교회나 신앙을 가지기 전에도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랬다. 단지 자기 노력으로 하다가 하나님의 힘을 또는 신의 힘을 의지하여 성공하려 한다고 늑대가 양이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양의 탈을 쓴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외식’이 바로 이것이다.


신앙을 가지기 전에서 세상에서 성공하려 했다. 그러다 교회에 다니고 나서 같은 성공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으로 치환하고, 성공을 바탕으로 주를 섬기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은 가치가 바뀐 것이 아니라 수단이 바뀐 것이다.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을 수단 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그런 생각에 종속되어 수단이 되실 리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 하나님이 우상인 이유다. 우상을 섬기니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다.


요엘서는 사람들의 이런 생각이 대중적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다. 메뚜기 떼로 인하여 제사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앞서 설명한 사람들의 가치관과 신앙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님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육신의 정욕인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얻으려고 하나님께 자기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일부를 드리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장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요엘은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밀이 없어서 제사가 없다고 했다.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밀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포도와 포도주는 말할 것도 없고, 기름은 그리스도의 직임을, 빵은 예수님의 육신, 곧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서 받는 구원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회복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포도주와 기름이 없는 것이 재앙이고, 하나님께서 그 재앙에서 회복시키신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은 포도주와 기름과 밀이 회복시키신다는 것이고, 그 회복이 구원이라는 명백한 선언이다.


요엘서가, 그리고 성경의 모두가 말씀하고 있는 구원은 분명한 증거가 있다. 포도주와 기름, 곧 그리스도가 넘쳐나야 한다는 분명한 증거, 기준이 있다. 이것을 감추고 성경의 구원을 논하고 전하면 다 거짓이고 거짓 선지자다. 구원 전했고, 구원 받았다고 보증하고 증거하려면 복음을 받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넘쳐 나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의는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이 아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것이다.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의 의로움이고 구원의 증거라면 예수님은 왜 고통을 당하셨고, 인생은 왜 늙고 힘 없이 병들어 죽게 만드셨겠는가?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이 구원 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아니라는 뜻이다. 


때로 구원 받은 사람이 세상에서 형통함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신 세상을 하나님의 의와 법으로 살기 때문에 종속되는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모두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으로 일관된 결과에 수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라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떻게 볼 것이며, 그 예수를 전하다 순교한 사도들은 또 어떻게 볼 것인지 해답이 없어진다.


다시 구원의 증거로 돌아와서 이야기 해보면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대화를 빼 놓을 수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이 대화 속에서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안다면 자기 속에서 예수님이 전해주신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이 영생하도록 솟아날 것이라는 것이다. 즉 구원을 받았다면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하나님 말씀이 영원히 샘솟듯 넘쳐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심령을 채운다는 것이고, 그것이 온전하다면 자기 속 심령에서 하나님의 의가 넘쳐날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니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넘쳐나는 것이 곧 구원의 증거라는 뜻이다.


이것을 요엘서에서 인용한 제사로 이야기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한다는 것이니 자기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에 자신을 내어 놓는다는 제물이 된다는 것이고, 그렇게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듯, 그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넘쳐 나와 자기 삶을 이끄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사의 회복이고, 단 포도주가 산에서 떨어지고 작은 산이 젖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 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솔짜기에 대리라(욜 3:18)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면,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인 죄인이 되어 지신 십자가로 인한 새생명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었다면 수가성 여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쳐날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증거다. 그것이 없다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선언이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의로 본 성경이 아니라, 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서, 세상의 가치와 바울이 말한 세상의 초등학문에 의지하여 바라본 성경에 대한 말들을 설교라고 하는 것은 구원 받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구원 받은 사람의 삶, 그리고 그들이 모인 교회는 요엘의 말씀과 같이 포도주와 같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늘 자기 안에서 솟아나와 넘쳐나고, 유다의 모든 시내, 곧 신앙 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들이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을 흘릴 것이고,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몸과 또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생수가 넘쳐나는 삶이다. 그게 아니라면 단언코 구원 받은 삶이 아니다. 성경이 그렇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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