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3:18-21) 하나님이 주시는 복, 구원(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9. 15:12 Writer : 김홍덕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


요엘은 메뚜기 떼의 재앙이라는 특이한 모티브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에 반하는 것에 대한 심판과 회복 그리고 축복에 관한 하나님의 생각을 전하시는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라는 말씀과 “성령이 오시면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요 …”라는 유명한 말씀도 있다. 그리고 끝으로 회복된 사람에게는 포도주와 샘이 넘쳐날 것이라는 축복의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 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욜 3:18)


결국 성경의 전체적인 주제인 구원이 요엘서의 주제다. 아주 짧지만 구원의 조건과 과정, 그리고 구원 받은 모습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아무리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도 이 요엘서에 나오는 말씀이 자기 안에 없다면, 그 경험과 증거가 자기 안에 없다면 구원은 없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먼저 벗어나야 하는 자리, 곧 죽을 자리라고 칭하는 어떤 자리에서 도움을 받아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을 논함에 있어 가장 먼저 정의되어야 하는 것은 어디서 구원을 받았는지가 정의되어야 한다. 즉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려면 구원 받기 전의 자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라는 것이 고백되어야 한다.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그 자리를 이방의 압제, 세상에 구속되어 종과 같은 삶을 사는 삶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그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애굽에서의 종살이, 이방 민족의 침략으로 인한 괴로운 삶으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한 의미를 그런 사건으로 알게 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요엘은 그 자리를 메뚜기 떼가 덮친 자리, 메뚜기 떼로 인하여 제사가 끊어진 자리가 바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리, 곧 사망의 자리라고 말씀하면서 구원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서는 요엘서에서 말씀하시는 메뚜기 떼의 재앙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 Conventional Wisdom(대중들이 상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오늘날 신앙에 있어서 Conventional Wisdom은 하나님을 믿어서 육신으로 살아갈 동안 육신이 평안을 얻고, 살면서 추구한 일이 성공을 거두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여기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말로는 세상의 귀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교회를 화려하게 건축하고서 그 화려함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받으신다고 말하고, 어려운 시험을 합격하는 것을 또한 하나님께 영광이라 하며, 세상의 일을 도모함에 있어 하나님께 기도하고서 해야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오늘날 신앙적 Conventional Wisdom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신앙적 Conventional Wisdom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절대적인 이방 가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형식과 외식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는 세상에서 가져왔다. 교회를 비싼 자재로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나, 세상의 높은 자리, 평안한 자리에 올라 교회를 다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 안에 있는 가치 기준은 전적으로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기준에서 온 것이다. 성경은 사람들의 이런 믿음을 간음한 것이라고 늘 말씀하신다. 요엘서에서는 이런 신앙적 Conventional Wisdom을 메뚜기 떼라고 말씀하신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은, 또 하나님은 그런 신앙에 대하여 지극히 회의적이다. 요엘서에서 재앙은 메뚜기 떼로 인하여 발생했고, 그로 인하여 제사에 소요되는 밀과 포도주와 기름이 메말랐는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대상은 메뚜기가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나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대중적인 신앙을 하나님께서는 이방으로 여기시고 진멸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 개인의 신앙에서 본다면 대중적인 신앙이 자신에게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할 때 여호와의 날이 임하고, 여호와의 날이 임하여야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순서를 요엘서는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몸담고 있고 의지하고 있는 대중적인 신앙,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 얻고자 하는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거룩한 예배에 걸맞는 것은 좋은 자재로 지은 교회당과 비싼 음향 시스템 그리고 실력과 업적(공로)이 뛰어난 설교자와 찬양단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최소한 세리와 창녀들과 먹고 마시는 천한 동네 나사렛은 아니었다.


그런 유대인들의 가치관은 예수님을 절대로 하나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 가치관과 오늘날 사람들이 가진 신앙적 Conventional Wisdom은 동일한 것이다. 즉 화려한 성전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여기고, 육신이 평안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복과 영광으로 여기는 그 가치관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가치관이고 의(義)며 선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메뚜기 재앙을 이방으로 간주하고 심판하신 이유가 있다. 이것을 알아야 요엘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구원, 그러나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고 뇌까리고 있는 구원 받아야 하는 이유와 자리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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