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서를 마치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12. 10:41 Writer : 김홍덕

<요엘의 주제와 내용 요약>


요엘서는 3장 밖에 없는 작은 성경이지만 우리가 아주 익히 아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시면…”에 관한 말씀과 그에 이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구원을 얻어야 하는 것은 메뚜기 떼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혹은 드리지 않는 자리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흐름의 시작은 “메뚜기 재앙”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리는 자연 재앙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이방으로 여기시는 가치관에 관한 것이다. 제사를 없게 만든 것은 메뚜기 재앙인데 그에 대한 보응은 이방에게 하시는 요엘서의 구조와 말씀이 그것을 설명한다. 결국 온전한 제사를 폐하는 이방인의 가치가 메뚜기 재앙인 동시에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이며 무엇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런 요엘서의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 온전한 구원을 얻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구원 받아야 할 자리라고 말씀하시는 메뚜기 재앙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우리의 어떤 삶과 가치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제사를 폐하였는지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치 않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제사라는 행위가 주는 선입견을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의 의가 나의 삶을 주관하는 것에 육신으로 사는 삶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나를 드린다는 측면에서는 제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처럼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생은 하나님의 의를 담고 그것을 육신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라는 존재 목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 온전한 제사다.


그렇다면 요엘이 메뚜기 재앙으로 인하여 제사가 폐하여 졌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사람이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메뚜기 떼와 같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제사가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수의 많음에 기초하여 온전하지 않은 제사를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구원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진 Conventional Wisdom이 서로가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으니 그것을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실상은 온전한 제사가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자리라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 요엘서의 말씀이다. 사람들이 가진 Conventional Wisdom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에 기인하여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제사(예배)드리는 것이다.


오늘날 이단은 물론이고 자칭 정통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실체는 사실상 우상이다. 먼저는 믿음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표상으로 보내신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저주받은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렇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고, 그 구원의 실체도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이나 그것을 담보하는 (세상적 가치로)선한 행위를 행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사람을 만든 목적 안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의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또한 메뚜기 재앙으로 요엘서가 비유한 하나님의 제사를 폐한 신앙은 하나님께 자신들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베푸시는 마음이 들도록 성경을 지키는 행위의 공로, 착한 말과 선한 행실을 드리는 것을 신앙이다. 특히 이것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대중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메뚜기 떼라고 한 것이다.


이런 신앙들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이 아니라 행위를 의로 여기는 하나님으로 조각한 것이고, 영광과 은혜와 복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의도 아니고 뜻도 아니며, 성경 말씀도 그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런 신앙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방이 바로 그런 신앙, 그런 가치를 가진 사람들과 그 신앙이다. 따라서 그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는다. 이것은 다들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말로만 안다. 행위는 곧 형식이고 나타난 것인데, 그것을 의로 여기지 않는다면 육신의 성공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라 하지 않을 것이며, 좋은 교회 건축물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하나님의 복과 은혜라 말하고, 좋은 건축물인 교회를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신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이 모순이고 거짓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니 메뚜기 재앙이다. 그 속 자기 신앙을 두고 의지한다는 것이 바로 재앙이고 어둡고 캄캄한 것이다. 자신이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려면 그것이 재앙이고 어둡고 캄캄한 거시며 하나님의 제사를 폐한 것이라는 온전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과 여호와의 신이 임하는 시작이고 구원의 문이다. 


감히 말하거니와 이 고백은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절망적인 고백일 것이다. 그 고백을 하기 전까지 자기 인생이 모두 죄와 사망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피를 토하는 것 같은 회개가 없었는데, 단지 교회에 가서 세례 문답했다고 얻을 수 있는 구원이 아니다. 구원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라면 하나님이 아들이 십자가를 질 이유조차 없다.


요엘서는 작은 성경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신앙 전반을 경고하고 있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은 하면서 자신이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신앙이지만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구원이라 말하니 그런 줄 아는 신앙,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했고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니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 신앙 역시 다들 그렇다고 하니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그 대중성이 메뚜기 재앙이고,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방이고, 구원을 받아야 할 자리다.


성경이 이렇게 오래 전부터 간절하고 명료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어제처럼 교회가 그렇다고 하니 자기 안에 확신이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더 잘 받을까 고민하고, 또 반대로 어떤 행위를 하면 안 되는가를 염려하는 것을 경건한 신앙이라 말하는 것에 계속 있을 것인가? 요엘서는 말한다. 그것이 재앙이고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방인의 모습이라고. 무엇보다 그 신앙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죄와 사망의 자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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