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처럼 되려는 것.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2. 3. 11:37 Writer : 김홍덕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 명제만 놓고 본다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먹었다는 것은 자기 몸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고, 또 반대로 생각하면 몸이 원하는 것을 먹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은 선악과를 먹고 싶게 하고, 선악과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명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죄인이라는 이 명제는 성경의 근간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기본 골격이다. 이 타락과 죄가 없었다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신앙이라는 것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놀기만 하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인류의 시작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고, 모든 인류가 그 그늘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의 첫 사건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그렇다 치고, 오늘 나는 선악과가 복숭아인지, 사과인지, 아니면 이제껏 먹어보지 못한 신비한 열매인지도 모를뿐더러, 도무지 누가 선악과라고 하는 나무의 열매를 소개시켜 준적도 없기에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왜 아담과 함께 도매 급으로 죄인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울함이다.


성경을 오늘 우리가 읽는다는 것은 분명히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상관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다른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안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의 마음과 같은 것이 있고, 또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모습과 같은 것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말씀을 읽고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또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과 사투를 벌이듯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모습 중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인지, 우리의 어떤 모습이 선악과를 먹은 모습과 같은 것이지를 안다면, 선악과는 아담이 먹은 것이 아니라 내가 먹은 것이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 역시 내 마음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나님은 신이시다. 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신이시다. 창조는 분명 무(無)에서 유(有)로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단순히 산과 바다, 또 태양과 지구를 만들고, 안드로메다가 되었든 무엇이든 우주와 같은 물리학적, 형이하학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생각과 철학, 그리고 법칙과 의, 이 모든 것도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보다 중요할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지배한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 사람들도 다 아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므로 사람이 생각하는 것, 사람들의 관념 속에 있는 의(義)라는 개념과 같은 것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 ‘의’를 가지고 있고, 또한 어떤 의를 자기 삶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빈 그릇과 같다고 하고, 때로 ‘사람 안에 든 것이 많아야 한다.’, ‘가슴을 적신다.’와 같은 말들을 공감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의, 자신이 어디선가 자기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의(義)’가 구현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늘 어떤 일에 있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가 한 명은 삶은 감자를 두고 설탕에 찍어 먹어야 한다고 하고 한 명은 소금에 찍어 먹어야 한다고 다투다가 이혼했다고도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감자를 뭐에 찍어 먹는 것이 뭐라고 그러나 싶겠지만, 그 상황은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 앞에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하고 관철시키는 하나의 모습일 뿐, 모든 사람은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모습은 작게는 문서를 타이핑할 때 왼쪽에서 간격을 얼마를 띄어야 하는지를 주장하는 것에서부터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결국은 단 하나 ‘나의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그 하나일 뿐이다. 하나의 사안에 생각이 같은 이들이 모여 세력이 되면 세력의 일이 될 뿐. 


사람이 가진 이 하나의 생각,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것, ‘이렇게 되어야 세상이 바로 된 것이다.’는 그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시도, 이것이 결국 세상의 모든 갈등의 원인이고 뿌리다. 여기에 선악과가 있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한다는 것은, 작은 일 하나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세상이 되어야 하듯 자신이 주관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고, 그 자기의 생각을 기준에 부합하면 선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모습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만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사람이 창조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이미 창조된 것의 응용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창조라면, 우주 공간에 어떤 것을 만들어 와야 하는 것이다. input 없는 output이라 할까?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존재고 능력도 없으면서 세상의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이 세상의 일을 자기 맘대로 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신앙은 순종이 제일이라고 한다.)


이렇듯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철시키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기의 이익>이다. ‘내가 유익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표현되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빨래를 걷어온 아내를 돕지 않고 누워있는 남편의 모습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이래도 된다.’는 생각이 없으면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에게 가장 유익하고, 자신에게 가장 편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그렇게 관철 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고, 자기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많은 열심 있는 신앙인들이 외국에 가서, 험한 곳에 가서 주님의 일을 하겠노라 외치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어야 하는 곳은 바로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작아 보이는 그 세상, 하지만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자신이 접하고 있는 그 접점에서 자신의 의, 자기가 유익되고 편하게 되는 것을 관철 시키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고, 순종이며, 그리스도의 본성인 것이다.


이 블로그에 그렇게 반복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아니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정말로 그렇게 생명만 있으면 되냐?’고 궁금해서, 또는 부인하듯 질문도 해 온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데 사람의 유전자, 곧 사람의 생명이 있으면 되지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 단순한 것 하나를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 것이며, 세상을 구할 것인가? 자기 앞에 펼쳐진 작은 세상의 일에도 순종 못하는데.


신앙인들이 신앙이 좋아지면 망각하는 것이 있는데, 신앙이 얼마든지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가진 신앙대로 세상이 되어야, 또 교회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것이 정말로 신앙이고 선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게 하려는 유대인들을 다 잡아다가 족쳤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믿음대로 되어야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실제로 베드로가 그랬지 않는가?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이러면 하나님의 일이 되겠느냐?”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 특히나 열심 있고, 계시가 밝다는 사람들이 이 오류에 매몰되어 있다. 자기가 생각하는 신앙의 방향대로 하지 않으면 죄라고 강요하는 것, 그 왜곡된 신앙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심화되면 이단이 되는데, 그렇다고 기성교회가 자유로운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강요하는 신앙은 사회적인 관념과 적당히 타협한 사마리아요, 세상의 법과 결탁한 이방 신앙일 뿐이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교회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강요를 견디지 못해서 가나안 교인이 되는지 우리는 보고 있다. 돈을 많이 내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면 가난한 이들이 견딜 수 없고, 교회에 봉사를 신앙이라 강조하면 바쁜 사람이 견딜 수 없으며, 노방 전도를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한다면 숫기 없는 사람에게 힘들고, 금식과 철야가 좋은 신앙이라 하면 허약한 사람에게 넘사벽이 되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자기가 가진 육신의 역량에 따라 표현되고 감당하는 것이지, 그것이 신앙의 기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육신과 삶의 한계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부인한다면 또 모르지만.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은 아주 작은 것이다. 눈앞에 마주친 어떤 일과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대로 하자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눈앞에 그 일을 펼치시고, 사람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달리 자기가 그 일의 주관자가 되고, 그 사람을 주관하려는 하나님이 되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순종하여 지신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즉 삶의 순간순간 사람은 하나님과 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삶의 현장에서 내 앞에 조성된 일들을 볼 때, ‘이래서야 되겠는가?’하는 순간 자신이 의로워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하시는 것이고, 저 인간이 왜 저러냐고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이 잘못하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잘못된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사람이 그러고 있다는 것,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딱 그 하나의 생각이 세상의 모든 죄와 분쟁과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서로가 옳다 주장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참 신앙은 세상의 일에 자신이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법을 좇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아내가 빨래를 걷어 왔을 때, ‘나는 피곤하니 쉬어야겠다.’가 아니라,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신앙이다. 행여 아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신앙이 없다고 생각하기를 ‘신앙이 없으면 몸이라도 굴려야지!’한다면 단언컨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다.(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딴 것이 아니라. 그때 그냥 빨래를 개는 것, 그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다면 목숨은커녕 자기 자신을 구원도 못할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데 어떻게 구원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삶,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어느 사회에서 비난을 받고, 어떤 나라에서 문제를 일으키며, 어떤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겠는가? 그리고 이쯤 되면 생각해 보라. 그렇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 자기 앞에 펼쳐진 일과 만나는 사람에게 자기 생각이 아니라, 펼쳐진 일에 순종하고 그 사람의 의에 따르는 그 사람이 셀 수 없는 신앙인들이 목이 터져야 부르짖기도 하면서 다짐하는 성경대로 사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사 그러려 해도 그럴 수 없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것이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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