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닷속의 생명체들에게 복을 주심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이 점점 왕성해지는 것을 독려하신 것 같아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이 모양인데 왜 하나님은 가만히 있느냐?'라던가, '세상이 이렇게 개판인데도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신은 죽었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자기 시대를 늘 "말세"라고 하며 한탄하는 이 세상의 형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지창조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천지창조의 과정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바다의 생물이 생육하고 번성하듯 세상에 죄악이 왕성해지게 하는 일이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세상을 어떻데 받아 들이는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은 보고 들은 것이 자신의 세계가 되고,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천지창조의 첫째 날의 시작 부터 이것은 동일한 관점이다. 빛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빛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어떤 인식이라고 했다. <학문에 밝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과 의에 대하여 밝아지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시작이다. 즉 빛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 빛이 무엇이라 인식하는가? 하는 것이 사람 안에 빛이 창조된 것이듯, 다섯째 날의 창조 역시 흔히들 세상이라고 말하는 바다의 생명들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복을 주셨다는 것은, 이 세상의 문화화 가치관이 왕성해지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다섯째 날의 창조 과정인 것이다.

 

사람들의 삶 속에는 어떤 것은 선하고, 또 반대로 어떤 것은 악하다고 하는 것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사실 이 가치관은 삶과 세상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에게 좋은 일과 나쁜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과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나누고 되는데, 이런 것을 나누는 이유가 좋은 일, 선한 일만 일어나기 바라고 자기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본능 같은 의식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은 취할 것으로 여기고, 어떤 것은 버릴 것으로 여기는 본능과 같은 의식이 모든 사람들과 세상의 문화 속에 만연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철학과 학문 그리고 종교의 연구 대상이고 발전 동력이다. 즉 철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라는 것이 추구하는 바가, 그들의 세계 안에서 선하게 여기는 것만 일어나게 하고, 악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철저치 배제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나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악한 일, 부정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옛날에는 제사을 지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을의 안위를 위하여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관점에서 전 재산을 교회나 종교단체게 헌금해 버린다거나, 때로 금식한다거나 하는 힘든 의사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이 악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신앙하는 신께 그것을 청탁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나쁜 것들, 즉 바닷속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향락이나, 돈, 그리고 음란함과 같은 것들이 세상에서 번성하는 것을 경계하고, 그것을 이기기 위하여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에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멀리하고 배척하는 세상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도 이것이 보기에 좋은 일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것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다섯째 날의 창조가 자기 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보시기에 좋은 일이었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 해 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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