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례는 형식적인 세례에 관한 것은 아니다. 논산 훈련소에서는 해 마다 수 많은 훈련병들이 세례를 받는다. 집례하는 물을 트럭으로 퍼 날라 가면서 세례를 주고 받고 있다. 하지만 세례는 신앙 고백이다. <"인간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자기가 마실 물로 삼을 수 없구나!">하는 것을 깨달은 후 하나님께 자신도 그런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 물로 세례를 집례하는 것, 그것이 침례든 세례든 그것은 의미 없다. 다시 말해서 그런 형식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 형식에 걸맞는 내용인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례 의식은 그런 고백을 하고 듣는 사람들의 옷이고 보증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라는 형식이 신앙의 증표는 아니다. 보이지 않는 내용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세례증서가 세례의 본질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자기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세례고 그런 고백을 한 사람이 보여주는 삶이 바다에서 드러난 땅이 내는 식물이다. <사진 출처:m.jlbook.co.kr>



이디오피아 내시장이 집사 빌립을 만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때,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행 8:36)라고 한 사건이 있는데, 여기를 봐도 이 내시가 이사야서의 말씀이 그리스도에 대한 것임을 알고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무엇이며, 누구신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았다는 것은 이 이디오피아 내시장에게 하나님의 천지가 열렸다는 것이고, 바다에서 뭍이 드러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의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사람들의 먹거리가 되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다에서 드러난 땅이 낸 식물이란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사람의 먹거리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다. 즉 궁창 아래의 물속에서는 살 수 없고, 궁창 위의 물이 있어야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이 먹는 하나님의 말씀은 땅이 낸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낸다는 것이다. 사람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은 환청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만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런 관계를 중재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러니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상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상태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일과 말과 행적을 보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한 말씀 말고 어떤 말씀을 하시겠는가?


이디오피아 내시장의 일을 우리가 볼 때, 지금 이 시대에 이디오피아 내시장이나 빌립 집사가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기사를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성경에 있고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말씀, 즉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는 일을 하고, 말을 하고, 삶을 사는 사람의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낼 수 있는 삶을 처음으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본 받아 살게 되어 그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는 모든 사람의 정체성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고, 이런 사람이 바로 천지창조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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