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신앙은 신앙을 버리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4. 13:46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에서 가장 기이한 일을 꼽으라면 아마도 아내를 누이라고 해서 다른 남자에게 빼앗길 뻔한 두 번의 일과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 중에서도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일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일이라는 것도 특이하고, 아브라함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 ‘줬다가 뺐냐?’하는 생각이 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을 순종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하셨다. 고향을 떠나서 그렇게 먼 길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한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하나님이라 결국 아들을 번제로 바쳐야만 하나님은 사람의 신앙을 인정하신다는 말인가? 그리고 아브라함의 여정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 여정을 말하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들을 다 번제나 아니면 신학교에 보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아들이다. 그러니까 이삭은 죽으면 안 되는 존재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한번쯤 이 사실은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순종했다. 과연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 많은 교회와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사회적 요구를 일축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큰 세력을 바탕으로 그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가진 신앙을 훼손당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가진 신앙이 훼손당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아들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점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성심성의껏 하려고 한다. 그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는데 그게 나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법에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다는 이유로 촛불을 훔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그 어떤 것도 반드시 하나님의 법으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에서 찾아야 한다. 정체성에서 법이 나오기 때문이다. 배구라는 종목의 정체성에서 배구의 룰이 나오고, 야구라는 종목의 정체성에서 야구에서 선하다고 하는(점수가 되고 이기는) 법이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정체성은 <존재의 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 이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름은 정체성의 대면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것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수고하고 봉사하면 상주시는 하나님이 그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 있는(Be) 자>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하나님을 믿는 평생의 일이 헛수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온 맘과 몸을 다하여 하면 그 공로를 잊으시는 분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그 기도와 수고가 생명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보답하신다고 하니 생명의 본성은 그것이 아님에도 하나님의 보응을 목적으로 했는지는 분명하게 가리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명의 본성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체성인 존재에 관한 것이다. 어떤 존재가 되면 그것에 맞는 행동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 생명의 본성으로 인하여 그 사람이 하지 않으려 해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일을 외면하려 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고 한 예레미아와 같이 본능으로 인하여 수고하게 되는 그 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은 정말로 힘든 것이다. 마음에는 하기 싫고,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해서, 또 교회가 그렇게 말하니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그런 삶은 끝내 하나님 앞에 허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억지로 하는 나라가 아니다.


바로 이 법을 아느냐 아니면 모르느냐가 이삭을 바칠 수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이요 법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법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해야만, 아니 정확하게는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고, 이 생명의 법을 모르는 사람의 신앙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지켜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생각의 뿌리가 성경을 지키지 않으면 화를 당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는 것에서부터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당한다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기독교가 가진 신앙의 본 모습이다. 하지만 이 신앙의 모습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지 않으면 당하게 될 화를 면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한다면 하는 것이 목적이겠는가 아니면 화를 면하는 것이 목적이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화를 당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다. 즉 신앙의 수혜자가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성경에서 왜 그렇게 하라고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지 않으면 혼난다는 것 그것 밖에 없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보지 않고 믿어야 믿음이다.’라고 그리고 또 ‘험한 꼴 당해봐야 안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그런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교회는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지 몰라도 적어도 왜 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삭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약속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신앙을 지키려고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또 신앙이 좋은 사람이 신앙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심판하고 갈라서는 것이다. 그런 모든 신앙은 하나님의 법은 모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애쓰는 안타까운 교회와 인생일 뿐이다.


반면에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밖에 없어서 하는 신앙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이 신앙은 자기 마음 안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개는 그 안에 개의 유전자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무리 ‘멍멍’말고 다른 소리를 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개를 죽일 수는 있어도 ‘야옹’하게는 못하는 것이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다른 짓을 하고 하나님을 떠나려 하고 용을 써도 아나 되는 것이다. 그런 신앙이 있다면 이삭을 바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닌 것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신앙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 즉 이삭으로부터 큰 민족이 나와야한다고 하나님이 하셨으니 이삭은 반드시 아들을 낳을 때까지 살아야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과 같은 본성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자기 속사람의 법인 사람은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하나님이나 같은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법은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법이다. 세상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시자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고, 칼을 휘둘러 예수님을 잡으러 온 베드로를 말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한 아들이 장가도 안 갔는데 번제로 바쳐지는 것과, 세상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이 세상을 구하기는커녕 세상의 법에 심판 받아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따라 가겠다는 사람들, 곧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면서 이삭을 지키고 예수님을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즉 신앙이나 교리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심판하고,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사회와 맞서고 심지어 자신들의 교인들을 축출하고 서로 다투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 안에서 다투는 것을 보면 다 자신들의 주장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싸우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즉 이삭을 바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창조이심과 아브라함에게서 난 아들로 인하여 큰 민족이 된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주이심을 믿는다면 그 일에 간섭할 일이 아닌 것이다. 할 일이 있다면 오직 예수님과 같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다.’라고 주장하는 주장 앞에 자신의 의와 뜻은 죄인이 되는 것, 그것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이삭을 바치는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또는 신앙이 좋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앙 없음을 심판하거나 하나님의 약속이 망해가는 것을 힘껏 막으려 하는 것을 본다면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하나님의 약속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거룩한 자리(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한마디로 신앙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하나님의 아들을 새롭게 얻을 수 없고 부활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다면 신앙을 버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죽고자 하는 자가 산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을 정말로 제대로 믿으려고 한다면 신앙이라는 것을 지키려 하지 말고, 신앙을 지키려고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주장 앞에 죄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 마음에 있는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야 한다. 마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려면 순종함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자기 생각대로 날뛰고 어떻게 그 안에 생명이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래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여정에서 너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여정을 거쳐내어서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이삭과 야곱에 이르러 12아들이 나오고 나라가 되는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의 화룡점정이다. 이것은 신앙을 버릴 수 있는 사람, 그들에게만 열리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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