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을 번제로 드린 아브라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26. 15:56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을 논함에 있어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에 따른 것을 빼 놓을 수 없다. 이 말씀은 정말로 대단한 순종의 말씀으로 회자되지만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은 참 고약한 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아한 요구를 했고, 그것에 보통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따랐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이 말씀은 정말로 어떤 말씀인가? 순종에 관한 말씀인 것은 맞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순종하는지 시험(test)해 보시려한 것 그것이 이 말씀의 의도인가 하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고행에서 불러내어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이끌어내신 택한 사람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지만 아들이 나지 않자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보려고 이스마엘을 낳아도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하지 않으시면서 끝내 주신 아들이 이삭이다. 그리고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이다.


지금 이 블로그에서 아브라함에 관한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누누이 이야기 해 왔다. 그렇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것이 위대함을 좇는 가치관으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의 정체성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는 자리로 이끄심이듯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 역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반드시 있는 일이라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이며, 그것은 또 오늘 창세기의 말씀을, 또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말씀을 읽고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 이삭과 같은 것이며,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것 마저 바치라고 하시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을 바로 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알기 위하여 먼저 아브라함의 여정을 잠깐 돌아보자. 아브라함의 고향은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았던 땅이다. 땅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 그 자체이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있던 땅은, 위대함을 좇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흙으로 벽돌을 만들되 그 안에 짚을 넣고 또 굽기까지 한 것과 같이,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는 하늘에 이르지 못한다고(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서 세상의 지식과 재물과 공로와 고상함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치장하여 하늘에 이르려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고향이고, 또 오늘날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 전에 사람들의 삶이고 가치관이다.


그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 인생의 자리, 삶의 모습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고향과 같이 사람이 위대하게 되어 하늘에 이르는 자리가 아니다. 아브라함도 롯과 갈등이 있을 때에 그런 위대함을 상징하는 애굽과 같은 땅을 롯이 선택한 다음에 남은 땅을 선택했다. 그랬더니 그 땅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는 위대함을 좇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려 하는 본성을 광야로 보내는 여정을 거친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아들이 생기지 않자 자신의 힘으로 낳은 아들인 이스마엘을 광야로 쫓아내는 것이다. 즉 행위로 성경을 지켜내려는 것,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율법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서 내어 버리는 여정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곧 백세에 아들을 얻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심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산에 가서 소나무 뿌리를 뽑는 기도로도 아니고, 성경을 몸을 지켜내기 위하여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고, 1월 한 푼 틀림없는 십일조를 드리려 노력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닌 자리에서 난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것도 아니고, 또 위대함을 좇은 것도 아닌 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것인데 그것을 왜 번제로 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과정에서 정말로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쩌면 놀랄지도 모른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생각을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관한 것은 양보 못한다.’는 식의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걱정을 한다. ‘세상에 동성애자가 많아지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는 생각, ‘신천지와 같은 이단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니 기독교인들이 막아야 한다.’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런 생각과 외침을 대할 때 정말로 마음속에 강력하게 드는 질문이 있다. ‘하나님이 그것도 처리 못해서 네가 걱정하고 돌봐야 하는 분이냐?,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창조주로 믿는 믿음의 본질이냐?’라는 것이다. 어떤가?


그리고 또 교회에서도 그렇다.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며 사람을 내어 쫓고 서로 다툰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삭을 지키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죽거나 손상당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상처 준다. 이삭을 지키려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걱정하는 것,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고 사람이 나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세상에 외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다 이삭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그렇다. 십자가를 지러 가는 말린 제자들은 다 이삭을 지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 보이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그것을 보이시려 하는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지 못하게 하려 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사회적인 문제에 하나님을 걱정하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상처주고, 신앙을 지킨다면서 다투고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이삭을 바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창 22:12)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 마저 주관하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 신앙적으로 귀하면 귀할수록 지키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뜻을 이루심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의와 가치관과 신앙의 귀한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요구 받을 때 내어주는 자리에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나 신앙심이 좋다는 사람들에게 각성을 요하는 말씀이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늘 신앙으로 사람들을 심판하려 한다. 이삭을 바치지 않겠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결국 신앙을 권력으로 삼는 것이다. 교회에서 신앙이 좋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일수록 신앙 없고, 세상적인 사람들이 그를 편하게 여기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에 순종한 삶이다.


하지만 많은 교회와 신앙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 목사나 목자나 자기들끼리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 앞에 가면 왠지 신앙이 없는 것이 들통 날 것 같은 두렵고 긴장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이 좋은 신앙을 지키려고 날이 서 있기 때문이다. 이삭을 바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질 수 없고, 좋은 신앙은 무시당하거나 손상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가장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존재인 이삭을 바치는 것이나, 이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받고자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간다는 사람들은 정작 신앙적으로 귀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죄인이 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거룩하고 높은 강대상으로 또 만나기 힘든 자리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삭을 바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안다면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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