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것


사람이 하나님께 진 가장 큰 죄는 무엇일까? 그건 한마디로 하나님이 자기를 조성하신 목적을 배반하는 것일 것이다. 자동차가 그 주인에게 지은 가장 큰 죄는 운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듯 말이다. 그런 상태는 하말티아라는 어원의 죄, 즉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다’이기도 하고, 또한 목적의 빚진 debt(채무)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가장 큰 차이이자 출발점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그 차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것은, 회개고 구원이며 안식이고 부활이고 영원인 것이다. 물론 다 계절 따라 생명의 성장이 다르듯 그 단계를 표현하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태어남이라는 대 시작이 있고 난 다음의 일이기 때문에 한 세계에 있는 것이다. 사람이 배우고 다치고 놀고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은 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사는 세계의 것들이듯 말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사함 받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사함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표현했다.

 

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존재의 자리를 떠나는 시작은 누구나 알듯이 <선악과>를 먹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선악과는 도무지 어떤 과일이길래 이렇게 인류를 힘들게 만들고 논쟁 가운데로 끌고 왔을까? 이것은 모든 기독 신앙의 근간이요 기초며 신앙의 이유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명쾌하게 설교해가는 큰교회는 잘 본 적이 없다. 대세는 거저 하나님의 명을 어긴 죄로 굳어진 상태다. 하지만 성경에 사람이 하나님의 명을 어긴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래서 대체로 합의된 것이 아마 처음에 그랬던 본성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들 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인류는 희망이 없다. 아직도 그러고 있으니 말이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명을 어겼다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 물론 형태는 그러했지만 뱀이 하와를 꼬실 때에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먹으면 어떻게 하나님처럼 되는가? 또 하나님은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살아있지 않았는가? 도무지 이런 복잡한 일들은 어떤 이야기일까?

 



 

선과 악은 대칭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이다. 한 과일 안에 있었으니 말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도 사실이고 죽는다는 말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은 선악과를 먹어서 되는 하나님의 자리에 존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가 아니다. 또한 바울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이 사망 가운데 있다 했기에 죽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시계가 목적을 상실하면 죽었다고 하듯, 사람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에 가려 했으니 그것은 죽은 것 분명한 것이다. 그 선악과의 정체는 바로 선하고 악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을 가진다는 것, 그것이다. 즉 사람이 어떤 일을 보고 그것이 선하다 혹은 악하다 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바로 선악과를 먹은 상태인 것이다. 먹은 것은 그 몸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아담도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잘했다고 여기거나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서는 자신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그 사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에 무화과 나무 아래 숨었던 것이다. 여기서 보여준 아담의 모습의 핵심은 잘못했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안에 어떤 것은 잘 한 것이고, 어떤 것은 잘못한 것이라는 기준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벗은 것도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렸던 것이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없던 행동들이었다. 아담 안에 어떤 것은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는 생각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인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하는 이유나, 시장에서 싸우는 두 사람이나 싸우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이다. <너는 악하고, 나는 선하다> 이것이다. 이것에서 더하거나 모자라는 갈등은 세상에 전혀 없다. 만약 사람 안에 어떤 것을 선하고 악하다 판단하는 판단이 없다면 세상은 바로 천국이 될 것이다. 사실 그게 천국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엇이 선한지 악한지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인데, 사람이 마음에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여기기 시작함으로 모든 갈등과 죄와 범죄가 생겨난 것이다. 세상의 혼란은 단 하나 그것 때문일 뿐이다. 그게 선악과고 그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다.

 

전쟁 영화를 보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산을 올라가는 병사들은 날아오는 수많은 총탄을 피해가며 전투한다. 하지만 그렇게 날아오는 총알을 일일이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방법이 있다면 총을 쏘는 벙커를 무력화 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저지르는  살인과 간음과 폭력과 같은 모든 범죄들은 다 날아오는 총탄일 뿐이다. 그 모든 원인은 바로 사람 안에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게 원인이고 바로 벙커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큰교회들은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기 위한 설교를 해대고 있다. 그러다 정작 목사와 교회들도 그 총알에 맞아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다. 원인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을 보고 그 행위로 판단함을 그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 자리를 회복한 것이다. 선악간에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요 권한이니 내가 나의 자리를 떠나 교만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안에 건방지게 하나님처럼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있었음을 고백함으로 내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 아래 거하며, 선악간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에 있는 죄를 사하고 사함을 받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선악간의 기준 없이 생명 그대로 본다면, 모든 빚을 탕감하기에 부족함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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