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에 나오는 뜻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늘의 뜻은 땅에 당연히 이루어진다. 하늘이 습하면 땅에 비가오고 습하며, 하늘이 추워지면 땅도 당연히 추워진다. 그렇듯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는 지는데 하늘의 뜻이 기준이 되어 이루어진다. 그렇듯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역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고 하셨다. 명백히 한다면 이 문장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선언일 수 있다. 


그런데 큰 교회에서는 이 문구를 이렇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 당신이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나의 삶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라고……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나의 삶’은 당연히 육신의 삶이다. 즉 큰 교회에서는 주기도문 뿐 아니라 기도를 가르칠 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당신의 모든 것을 들어 주십니다’라고 가르친다. 그 당신의 모든 것이라는 것이 또한 육신의 형편을 개선하는 것이라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마음이 들도록 열심히 노력하라는 조건과 함께……


하지만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은 육신의 어떠함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늘은 육신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은 영이신 하나님의 의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의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의 따뜻한 기운이 땅에서는 꽃이 피는 것으로 표현이 되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이 인생인 나의 삶을 통하여 표현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땅>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을 의미한다. 하늘과 대칭이 되는 표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연의 이치처럼 하늘은 하나님이고 땅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늘이 흐리면 땅에 비가 오는 것이다. 땅의 기후가 스스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심은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보통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저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으시다. 그것을 묻는 것은 하나님을 무당 취급하는 꼴이니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좋겠다 싶다. ‘대학원에 갈까요? 취업을 할까요?’ 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면, ‘아무거나 하면 된다.’라고 답하는 것이 좋다. 좀 더 친절하다면, 하고 싶은 것이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하면 그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대학원인가요? 취업인가요?’라는 질문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질문이라고 여긴다면, 그런 것은 이미 세상을 만드실 때 다 할 수 있게 두시고, 지금은 너의 존재를 바라시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다. 그러하기에 그것을 사람이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이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대학이나 취업이나 결혼은 다 자기의 힘으로 대학도 갈 수 있고, 취업도 할 수 있고, 이 여인과 결혼할 수도 있고, 저 여인과 결혼할 수도 있다. 다만 어떤 선택의 결과에 따른 수고를 감당하기 싫어서 명분을 얻으려고 하나님의 뜻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은 말 그대로 하나님만이 할 수 있고 품을 수 있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땅에게 하늘은 그런 것이듯,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도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람에게 있어서 하늘의 뜻이란 자기로선 알 수 없고,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아는 사람의 요소가 바로 하늘의 뜻이다. 그것은 바로 인생이 창조되고 내가 존재하는 목적과 이유이다. 그것은 어떤 인생도 자기의 의지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정할 수 없다. 자기 의사로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육신의 부모에게 있다고 우기는 것은 더 무식한 것이다. 그 부모도 똑같은 인생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 나에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늘 자신이 살아가는 정황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왜 이런 일어났을까?’ 하면서…….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저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단 하나라는 것과 그것이 무엇인가만 안다면,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위하여 사는 인생에게 그것의 의미는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자기의 삶으로 체휼이 되었으니 그것을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그것 하나뿐이다. 그 하나를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부하게도 하셨다가, 가난하게도 하기고, 때로 아프게도 하시기도 하고, 때로 흥하게도 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모르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일으키시는 일들에 대하여 “왜 내게?”라는 의문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이다. 컵을 사는 사람은 늘 그 컵으로 음료수를 마시기 위한 뜻을 가지고 컵을 산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때로는 뜨거운 커피를 타서 마시기도 하고, 때로는 라면 그릇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때론 콜라를 먹기도 한다. 게다가 좀 더러워지면 그 컵을 찬물에나 뜨거운 물로 씻기도 하고, 때로는 식기 세척기에 넣어서 괴롭히기도 한다. 컵의 입장에서 보면 이만저만 난감하고 헷갈리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이랬다가 대로는 저랬다가 하니 그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존재 목적이 자신의 주인이 깨끗한 음료를 마시기 위함이라는 것만 알면, 차가운 물에 있어도 왜 그런지 알고, 뜨거운 물에 있어도 왜 그런지 알며, 커피가 담겨도 왜 그런지 알고, 콜라가 담겨도 왜 그런지 아는 것이다.


그렇듯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이기 때문에 그 지으신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다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그 아버지의 성품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오게 되는 것을 위하여 라면 그 사람이 때로는 부하게도 될 것이고, 때로는 빈고한 가운데 처하기도 할 것이며 또 때로는 아플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사업이 흥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지으신 이의 목적에 이르게 하시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만나게도 하시고 자신의 형편이 변할 때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생각해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니 하늘의 뜻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그 삶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 그것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큰 교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육신의 형편과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신앙의 목적이 육신의 안녕에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이야기고 현상이며, 또한 지금 큰 교회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긴 전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기도를 가르치셨다.(마 6:5-8) 외식이란 형식에 집중하는 것이다. 인생에게 형식은 무엇을 먹느냐? 무엇을 입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이다. 반면에 내용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외식하는 자와 같지 않으려면 육신의 삶에 대하여 중언부언하며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 곧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과 의를 알기를 간구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이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관한 기도를 그치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이며, 존재의 하나님께서 나를 두신 그 뜻에 대하여 간구하는 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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