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족의식>에 관한 말씀이다. 이제 세족의식은 단순히 종교적인 퍼포먼스를 넘어서 TV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인용될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한 탓에 발을 씻긴다는 것의 의미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면 발을 씻어야 했고, 그래서 주인이 집에 오면 종들이 그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례로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손님에게도. 그러니까 발을 씻긴다는 것은 씻기는 사람이 발을 씻는 사람을 섬기는 관계라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전에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된 줄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이 말씀은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이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을 사랑하시므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고 자기 목숨을 내어 주려 함이라>고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막 10:45)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심으로 제자들을 발을 씻기려 하자, 베드로는 자신의 발을 씻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셨고,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그러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부탁하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길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요 13:6-10)


많은 경우 세족의식에 대하여 생각하거나 설교를 할 때, 세족의식의 의미보다 <목욕한 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본 뜻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섬김을 받지 않은 자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섬기시는 섬김을 받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아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섬김이 바로 십자가이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심으로 발을 씻기셨으며, 발을 씻기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 줄로 알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야 사랑할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종들이나 하는 행위를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하셨다는 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종과 같이 섬기는 일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섬기신 섬김의 결정체는 누가 뭐라 해도 십자가다. 십자가는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벌을 대신 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도 온전한 의(옳음과 맞음)를 가진 이가 그렇지 않은 이의 주장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사건이다. 이 관점은 아주 중요하다. 예수님의 섬김이 어떤 섬김인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또 유대인(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왕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하나님께서 왕으로 여기시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이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과 왕이라는 것을 밝혔다고 죽여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죄인들이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의로움으로 의인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섬김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늘 말씀하셨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가장 온전한 의와 법을 가지셨음에도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죄인들이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의로 예수님을 심판할 때 그 심판에 순종하신 것이 십자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섬김이라는 것을 보이시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섬기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과 무관하다는 것을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섬기신 섬김이 없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의 섬김이 자신의 섬김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성전의 규례를 주실 때에 물두멍을 만들라고 하신 것에서도 나온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글을 참조) 예수님의 섬김이 자신의 섬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는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주제별 성경 보기/짧은 이야기] - 성전의 물두멍과 세족의식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님과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 상관이 있다는 것은 2인칭의 관계요 <내용과 형식>처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신 하나님의 의가 그것을 본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섬기심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섬김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관계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지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진 삶, 곧 목욕한 자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생명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 부활 생명, 하나님께서 어떤 정체성을 살았다고 하시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또한 당연히 생명에 관한 것이다. 생명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으로 나면, 제 아무리 대단한 수를 가지고 있어도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예수님과 같이 살지 않으려 해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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