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찢고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8. 6. 26. 09:57 Writer : 김홍덕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니 정확하게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에 다니는 것은 엄연히 예수를 믿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예수님은 한 분이시기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있어서 믿음의 온전성은 변수지만 믿음의 대상은 상수다. 자신이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든 예수님의 정체성은 온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도 상수라고 하기 어렵고, 다니는 목적 역시 상수는 아니다.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나 예수를 믿는 목적은 사실 상수가 아니다. 다들 자기들 만의 목적이 있다. 구원을 포함하여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준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부터 정치적인 목적까지 다양하다. 물론 자기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수용하는 것임을 믿는 사람도 있다. 그런 믿음은 수동적인 믿음이다. 구원과 천국을 포함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이나 구원을 비롯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거래다. 하나님께서 천국과 구원을 약속하신 것은 그 약속이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계획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육신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천국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이것을 느낄 수 없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이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는 괴로움에서의 구원이고, 그 삶이 사후까지 연장되는 것이 천국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 동안은 곤고하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다. 웃기는 것은 죽음은 흔히들 착하게 살면 천국이나 극락에 간다고 생각하듯 이 세상 삶의 연장이지 전환, 그것도 세상에서는 고생하면 죽어서는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는 생각과 같이 이 세상과 사후의 삶이 연장선 상에 있다고 여기려면 모든 방면에서 그러해야 하는 것이지, 착한 행실로 착한 행실을 한 사람에 대한 보상이 있는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면서, 이 세상을 고난으로 여긴 삶이 죽어서는 기쁨이 된다는 전환은 서로 다른 개념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단 한 가지 근거는 이 세상의 고생이 천국의 보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한 거래기도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바로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의 본질적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메커니즘은 어이없게도 부족한 신앙에 대한 문제 의식을 희석시킨다. 행위로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노력의 부족함을 용납하는 변명으로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경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그것을 다 지킬 수 없고, 이것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신앙을 정의하고 있기에 때로 부족한 것을 앞으로 잘 할 것이라는 고백과 전제만 있다면 용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지고 온 더 큰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에 삶을 올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는 개념 아래에 있으면 노력은 지속적인 것이기에 지금 좀 부족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족하기에 하는 행위인데 지금 이 시간 예수 믿는 것에 올인할 동기부여가 매우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항상 부족한 상태와 동행한다는 것은 문제를 전부로 보지 않는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 신앙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옵션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선 행위 규범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인생의 옵션이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문제도 아니며,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다 이루지 않아도 괜찮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하심을 잊으면 안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기본적이고 절대적으로 내가 누구인지의 문제이며, 그것은 인생 전체의 문제이다. 즉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을 믿기에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들이 온전하지 못하고 인생이 연약하다는 핑계로 늘 노력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이기에 신앙을 삶의 일부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누가 좀 더 노력하는지, 그래서 목사나 장로가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따지는 것이 존재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는 없다. 천국? 못 간다. 구원? 없다. 생명? 그게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을 것이면 바로 믿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럴 값이 아니라면 그냥 세상을 즐기면서 사는게 낫다. 어차피 구원도 못 받는데 삶을 경건이란 이름의 구속을 하나 더 당하면서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렇게 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어 구원을 얻고 천국가야 할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사는 이유와 의미를 알고 삶이 감사하고 만족과 안식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신앙을 하나의 옵션처럼 여겨서는 곤란하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이 선명해지지 않고, 삶이 만족스럽고 감사하지 않다면, 단지 닥치는 문제와 고난을 예수의 이름으로 이겨내려 투쟁하는 것이 지금의 삶이라면 모든 것을 버리고 먼저 자기 삶의 의미 곧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여야 한다. 옷을 찢고, 또 옷을 버려 두고서 예수님이 보이신 길을 좇아야 한다. 삶의 모든 형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버림과 올인은 삶의 모양과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다. 형식을 버리는 것, 삶의 형식을 버리라고 하는데 삶의 모양인 직업이나 생업이나 사회를 버리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바보다. 버릴 것이 삶의 형식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행위로 믿는 것이고, 형식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삶의 모든 형식,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직업을 버릴 것이 아니라, 직업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할 것인지를 간구해야 한다. 성경을 의문스런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되기를 간구하여야 한다. 이런 간절함 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예수를 조롱하는 것이다. 육신을 십자가에 버린 주님을 따라간다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욕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약시대에는 회개를 할 때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 섰다고 했다.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겉 옷(형식과 삶의 지위를 상징)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입고 있는 옷, 곧 하고 있는 사업과 영위하는 삶의 풍요와 안정을 기도하고 간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망과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여기를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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