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1장, 막 12장, 눅 20장)


포도원 주인과 소작농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두 가지 의문이 있다. 하나는 소작농들이 ‘왜 소출을 주지 않으려 했을까?’다 단순하게 주인이 되려고 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나중에 주인이 와서 너무 단숨에 그들을 징벌하는 것에서 애초에 게임이 안 되는 것인데 왜 그랬을까 하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소출을 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얼마를 달라고 했고, 포도원도 자기들의 것이 아닌데 일반 상식으로 도저히 그럴 이유가 없다. 


다음으로 의문스러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 끝에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시편(118:22)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포도원을 만든 사람이 소작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소출 얼마를 얻으려 했는데 주지 않아 진멸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는 비유의 내용과 건축자의 버린 돌은 언뜻 상관성을 유추하기 어렵다. 이것이 참 의문스럽다. 반면에 이런 다소간 상식적이지 않고 상관성 없는 이야기를 대제사장, 서기관과 장로들은 이 포도원 비유와 말씀이 자기들 이야기라는 것을 바로 찰떡 같이 알아듣고 화를 냈다.


우선 이 비유의 말씀 앞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이 와서 예수님의 권세에 대하여 질문하고,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를 답하면 대답하시겠다고 한 것에 대하여 대제사장과 무리들이 답할 수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그럼 나도 답 할 수 없다”고 하신 대화가 있다. 포도원 비유의 말씀은 바로 그 상황에 이어서 나온 비유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마 21장, 막 11장, 눅 20장)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있는 이 시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과정에서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는 시점이다. 모든 대화의 주제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사실 성경의 주제가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그 주제의 흐름에서 보면 제사장 무리가 예수님께 권세를 물은 것도 예수님께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물은 것이고, 이 비유를 통해 그 권세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고 소작농들은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를 죽이려 드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재밌는 것은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장로들은 지금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포도원이 나온다. 포도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예수님을 상징하는 과일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시기도 했다. 성전을 지을 때, 또 제사장의 옷을 만들 때 청색, 자색, 홍색 실을 함께 엮었는데, 이 자색실 역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아담은 ‘붉다’는 의미의 단어고 하늘은 항상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 그 기초다. 하늘의 색인 파란색과 땅의 색인 붉은 색이 하나가 되어 포도와 같은 색인 자색이 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과 그 둘이 말씀이 육신이 되듯 하나가 된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함께 역여 성전과 제사장의 의복을 만든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과 그 둘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다는 의미다.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주인이 포도를 얻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하시는 분이며, 이를 위하여 포도원과 같은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창세기 천지창조와 사람을 지으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창 1:27)을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을 얻으려고 세상과 사람을 만드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결국 이 세상을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목적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사람을 얻고자 하심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사람이란 십자가를 지고 낮은 자리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다.


그러면 앞서 제기한 문제, 왜 소작농들은 주인이 달라는 소출을 주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보자. 충분히 드릴 수 있었다면 소출을 드리지 않을 별다른 이유가 없는 상황인데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드릴 것이 없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 비유를 제사장 무리는 바로 잘 알아들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자신들의 종교생활이 하나님께 드리지 않은 것이며, 그들의 신앙 가치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을 지키고 행하면서 살았는데 이를 비난한 자들을 배척하고 심판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종을 죽인 것이라고 하니 화가 난 것이다.


포도원 비유의 핵심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드린다는 것은 주인 곧 하나님의 종을 죽이고, 주인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당연히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예수님 말씀의 대상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소출이라 여기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포도, 곧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신다. 그것이 포도원, 곧 세상을 지으신 목적이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 이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를 말씀하신 적이 전혀 없다. 사람이 인지하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며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본성이 되어 하나님 아들로 살아가는 사람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세계로 가져오면 그 세상의 전부가 된다. 각 사람의 개인적인 인생은 그의 전부다. 한 개인의 출생은 그에게 천지창조와 같고, 한 개인의 죽음은 그에게 세상의 종말이다. 그리고 한 개인이 가진 인생은 하나뿐이다. 그런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구한다는 것은 그 인생 자체가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개인은 포도원 주인이 원하는 포도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을 드리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보낸 종과 아들을 죽이는 삶, 그 둘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이 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것은 건축자와 건축자의 버린 돌을 모퉁이 돌로 쓰는 이는 모퉁이 돌 곧 주춧돌에 대한 가치와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의 주춧돌과 같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세상의 관점과 하나님이 다르다는 말씀이다. 주춧돌이 다르다면 집 곧 성전이 다르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비싸고 좋은 건축자재와 고가의 멀티미디어 장비로 성전을 건축해야 거룩하고 좋은 성전이 된다고 생각하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가진 생각과 가치로 볼 때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심판을 받아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주춧돌로 삼으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사람이라는 성전과 사람들이 조각한 하나님이 거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포도원의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소출을 주지 않은 이유와 같다. 주인이 원하는 포도와 자신들이 생각하는 포도가 달랐기 때문에 드리지 못했듯 성전의 주춧돌로 삼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도 하나님과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소작인들은 건축자와 같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가치와 안목과 의를 가지셨다. 그들은 주인이 원하는 포도를 건축가와 같이 다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내어 놓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소출을 받으러 온 종들을 죽였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면 이제 자신들이 원하는 농사만 지으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아들도 죽인 것이다.


이 비유의 말씀을 옛날 유대인들을 책망한 비유로만 들으면 안 된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들어야하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과 다르다. 자기 육신의 정욕이 추구하는 평안과 성공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를 구한다. 그 관점에서 예수님은 버린 돌이다. 세상의 높은 곳이 아니라 자기 본성에 끌려 스스로 낮아지고 죄인이 되며 육신을 종과 같이 수고하는 것에 내어주는 그리스도는 높이 올라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가치관을 가진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을 건축하는 건축자가 볼 때는 쓸모없는 돌과 같아서 버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버려지는 온전한 그리스도를 구하실 때 드릴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제사와 관련하여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갈등을 표현하신 이유가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