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망 받는 것, 곧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알지 못한 체 살아가는 모든 어두운 일들이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밝히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남으로 인하여 빛 아래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바울사도가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어두움은 조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모르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이유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므로 인하여 어두운 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것이 드러난다는 것은 빛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빛은 물리적 태양이 아닙니다. 이 빛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모든 것이 밝은 사람이 왔다는 것입니다. 컴맹들만 있는 교실에 컴퓨터 선생님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모른 체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살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 곧 사람을 향한 뜻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므로 인하여 세상은 분명한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전하러 오셨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니 사람들이 그 말씀 속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니 그것이 심판이고 책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으로 책망 받을 어두움의 일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께서 또 이 편지를 수신하는 성도들과 같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거하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두운 자들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바울사도의 권면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곧 빛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빛 가운데 속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사도는 잠자는 자들이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서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 역시 이 권면의 일부이고 궤를 같이하는 말씀입니다. 잠자는 자는 빛이 비취면 일어나고 죽은 자들은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가 잠자는 자고 누가 죽은 자들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달리다굼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예수님의 기적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었고 죽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시니 소녀가 살아난 사건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하시니 비웃었습니다. 여기서 정말로 죽은 이들은 소녀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사람들입니다.


자는 것과 죽은 것의 가장 큰 차이는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유무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의학적,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는지 아닌지의 유무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졌는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자는 것과 죽은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알고 일어나면 자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이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었다는 것을 늘 하는 비유와 같이 시계나 컴퓨터와 같은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을 알려주는 존재 목적을 가진 시계가 시각을 알려 줄 수 없는 것이나, 계산을 해야 하는 컴퓨터가 계산하지 못하면 맛 갔다고 하는 것이 바로 죽은 것입니다. 주인의 목적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목적을 자신의 존재 의미로 받으면 산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 자기 옳다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종과 죄인으로 내어주고 육신을 십자가에 내어주듯 수고하는 것임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질 때 자기 옳다는 것에 매몰된 사람이 십자가를 진 모습의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백부장이 그랬듯.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인생이란 자기 육신의 평안과 성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육신을 육신의 정욕을 좇는 이들에게 내어주는 것이 인생의 본질적 의미라는 것을 깨달으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아나니 그 과정은 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오히려 그 십자가를 힘입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사람은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성도들에게 잠에서 깨어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는 자들도 죽은 자들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육신 가진 인생의 존재 목적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순종하므로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 되고 산 자가 되기에 일어난 자가 되고 그것이 바로 자다가 깨어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오신 그 자체로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인생의 본질적 존재 목적을 인식하게 되는 빛을 만나게 되고, 그 빛을 인하여 그 사람의 세계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세계가 되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경험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빛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상에서 지는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이셨음에도 오히려 그 예수님을 힘입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일어나지 못하는(자다가 깨지 못하는) 죽은 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본성이 된 자들은 빛 가운데 있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은 깨어서 일어난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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