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경스럽겠지만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혼돈을 겪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욥의 고난에 비할 수 있다. 이것이 생경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저는 욥기에 대한 이해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안목 역시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속적이라고 하는 것은 누누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들은 육신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이라고 믿는 신앙을 말한다.


사람들이 가진 욥기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그렇다. 멀쩡한 욥을 마귀가 시험하여 욥이 고난을 당하고, 그것을 견뎌낸 욥을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물질과 행복을 곱절로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관점을 관통하는 가치관은 육신의 축복이다. 축복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시련이 있으며 그 시련을 견디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가치관이 뼈대다. 이것은 예수님이 육신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이기를 바랬던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가치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날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구하고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는 대부분 신앙인들의 믿음이다. 그리고 욥의 고난을 육신의 축복의 자격과 조건으로 여겼듯,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육신으로 힘들지만 성경을 지켜내는 공로를 하나님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막히게 일치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기도하는 아버지 집에서의 장사라고 일갈하셨다.


욥기는 이 블로그에서 제법 상세하게 다루어 두었다. 아마 일반적인 교회나 신학에서 만나지 못한 본질적인 내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상세한 내용은 해당 포스트를 보면 되겠으나 간략하게 욥기를 정리해 본다면, 욥기가 말하는 욥의 고난은 하나님이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갈등의 곤고함이다.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정체성은 알았는데 그것이 왜 세상의 기준으로 귀한 모습으로 연결되지 않는지를 알지 못하는 괴로운 과정을 보여준 것이 욥기의 핵심적 내용이다.


욥이 겪은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신으로 알다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며,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무엇이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난 다음에 겪는 영적 갈등임을 보여준다.(출처: https://www.elphis.or.kr/category/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Bible become My Story])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 욥기를 마치며...



욥은 욥기에서 앞서 말한 세속적인 관점을 가진 세 친구(빌닷, 소발, 엘리바스)와의 변론에서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았고, 여호와는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여 그 심판의 결과를 보고 사람에게 고난이나 혹은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고난이 자기 행위로 인함이 아니라는 것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는 것에서 욥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오늘날 신앙인들은 물만 엎질러도 자신이 하나님께 뭐 잘못한 것(행위)가 없는지 생각한다. 심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런 욥이 고난을 당했다는 것은 친구들에게 변론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분명하고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귀한 것이라는 것도 알겠는데, 그렇게 귀한 것을 아는 사람은 왜 세상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냐는 것에 관한 곤고함이었다. 더 나아가서 고난을 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신으로 아는 이들(친구들)에게 이렇게 학대를 받아야 하는지 그것을 알 수 없는 욥의 마음이 바로 욥의 고난이다.


이 욥의 고난은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받는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분명히 아는 욥이 왜 세상의 가치로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지 알지 못하는 곤고함이 욥의 고난이다. 이는 모두 그리스도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왕이 되어야 한다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겠는데, 그 하나님 아들 예수가 왜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저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배신 같은 말을 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겪는 말할 수 없는 곤고함과 같다.


이렇게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데 대접 받지 못하고 고난당하는 욥의 마음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은 알겠는데 왜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지를 알 수 없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갈등이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이 장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와 욥의 상관성을 논하는 이유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과연 이런 고난과 갈등을 체휼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성경이, 아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간절하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보이셨음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심판한 세상 가치관으로 이기고 성공한 자리에 오르려 한다. 그런 이들에게 욥의 고난이 제자들이 이 깊은 고뇌가 있을 리 없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예수님을 보고 있노라니 그 마음의 갈등을 감당하기 힘든 지경이다. 아마도 그것은 욥기를 통해서 묘사한 욥의 고난에 버금가는 갈등이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오늘날도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대접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천지를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더 이상의 귀함이 없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 동일한 곤고함, 정말로 욥의 처절한 괴로움과 베드로와 제자들의 감당하기 힘든 괴로움을 동일하게 겪을 수밖에 없다. 


그게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는데 구원이 어디 있으며, 거듭남이 어디 있겠는가? 부활과 영생 ? 그건 꿈이다. 자신이 오히려 세상에서 천한 자리에 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 예상치 못한 전개에 감당하기 어려운 갈등과 고민을 겪은 신앙인들의 심령 또한 그와 같이 감당하기 힘든 여정을 지날 것이다. 이 과정 없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천한 존재로 나타난다는 것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낮아지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발견했다면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모습들을 자신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수 없이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의지하여 세상이 귀하다고 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과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예수님은 낮아지고 낮아져서 세상에서 가장 천한 사형수가 되어 최고의 악인들에게 언도되는 십자가를 지고 그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을 빌고 있다는 것이 정말 신앙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상식적 논리로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좋은 신앙이라 생각하니 어떻게 베드로와 제자들의 이 갈등을 이해할 수 있고, 욥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명확한 괴리를 아무런 갈등이나 고민이나 묵상 없이 알 수는 없다. 예수님을 지척에서 함께한 제자들도 죽을 만큼 힘들었고,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자랑할 정도의 욥도 오히려 죽기를 구할 정도의 갈등이었는데 그냥 교리 문답 때 소책자에 적힌 대로 답하는 것으로 이것이 자기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좋은 신앙으로 여기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니 참으로 참담한 것이 오늘날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마주한 낯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였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창조하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말인가?” 제자들로서는 이 악몽 같은 의문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 고통이 얼마나 깊었는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제자들은 회복되지 않았다. 모두가 기대했던 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셨고, 그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도 그들에게는 “어떻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라는 이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뭔가 제대로 된 것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부끄럽고 예수님 앞에 고개 숙이게 만들었지만 그런 죄책감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게 하지는 않았다. 눈앞에 분명히 보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열리지 않는, 자신의 것이 되지 않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나중에 성령이 오시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미리 하신 말씀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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