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6:9-16) 먹으나 배부르지 못하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1. 5. 06:25 Writer : 김홍덕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여기시는 인생이 어떠한지에 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마디로 뭘 해도 성에 차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먹으나 배부르지 못하고 속이 항상 빌 것이며 네가 감추나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네가 씨를 뿌리나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을 밟으나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미 6:14-15)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는 인생들의 삶은 한다고 하나 소득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만족이 없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먹었는데 배부르지 않고, 감추었는데 보존되지 못하고, 씨를 뿌리는데 추수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의도한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그 이유가 오므리와 아합의 율례와 예법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므리와 아합은 선지자 엘리야와 맞섰던 왕의 집안을 이야기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왕이 가진 율법적인 예와 그 예를 지키기 위한 법을 좇았기에 삶이 의도대로 되지 않고 만족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의 신을 말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풍요와 다산을 섬기고 신앙하지만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해도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의도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성취도 없고 당연히 만족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다고 하셨는데, 그 에덴동산,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그 동산의 이름 ‘에덴’이 바로 <만족>입니다. 즉 선악과를 먹고서 만족이라는 세계에서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평생 수고하여야 할 것이라고, 땅을 갈아야 겨우 먹고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만족의 동산에서 내침을 당한 것이나 미가 선지자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먹어서 배부르지 못한다는 것이 만족이 없다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을 생각하면 결국 사람이 만족하고 안식하지 못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음을 인함이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사람이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때에 자신이 사력을 다해 힘쓰는 것에 만족은 고사하고 끝도 없으며, 자고 일어나면 기계처럼 또 그 일에 귀속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순환 속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적인 깨달음도 결국은 바알과 아세라가 약속한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는 본성, 세상에서의 성공이 곧 성공한 인생이 된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삶의 모습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완전한 지혜에 이르지 못하고, 자꾸 하나님께 어떤 것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가져갈 것을 세상에서 이루어내려고 하는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걷듯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인생이 그러한 것은 오므리와 아합의 율례 곧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마음을 인함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고 그 소산을 하나님께 가져가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 삶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지만 그 안에서 답도 만족도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세상의 성공을 좇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런 목적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그 어디에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큰 성공과 열매를 거두어 자신에게 바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한 모습이 성경에 있지만 그것은 그 성공을 추구한 탓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 결과의 일부일 뿐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과 다르게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가 약속한 풍요와 다산을 섬기기에 그 인생에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하나의 목상이 아니라 세상의 성공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라 여기는 모든 가치관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공로와 육신의 먹거리의 풍성함을 신앙하는 것은 창조 목적에 위배되기에 만족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으로 못을 박으려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어떤 스마트폰도 못을 박는 것을 만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스마트폰도 이만저만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연히 망가질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도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며 하나님과 사람은 어떤 존재로서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하는지를 바라시는데,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 인생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렇듯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뜻과 다르게 살아가기에 인생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사니까 일일이 간섭하시듯, 아니면 따라다니면 사람을 괴롭히고 벌주시며 만족이 없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렇게 복잡하고 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 하나님의 법과 다르게 사니 살아가는 모든 순간과 행동이 괴로운 것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것도 크게 오해합니다. 자신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뭘 잘못했지?’라고 반문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원치 않는 일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잘못된 행동(Do)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가는 일 잘 안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교회에 다녀야 풀린다.’고 생각하거나, 이것저것 해도 안 되니 ‘하나님께서 목회 하라고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사사건건 심판하시는 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그런 주권이나 절대로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존재가 확립되면 밟는 대로 우리의 땅이 되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어 만족한 삶이 되면 생육하고 번성하며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게 해 놓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행위의 어떠함을 의롭게 혹은 불의하게 여기시는 분으로 생각하니 자기 행동 하나하나에 하나님께서 관여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본성으로 자리하고 있는 사람은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먹으면 먹는 대로 배부르고 씨를 뿌리면 뿌리는 대로 열매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그 의와 목적대로 사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그 매뉴얼대로 잘 사용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제하던 일을 오늘 또 하면서도 그 끝을 알 수도 없는 살면서 삶에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문제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단순한ㄴ 것 하나 이외에는 다른 이유나 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 하나를 모르기에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를 비롯한 성경의 모든 말씀은 바로 그 하나를 말씀하는 것이고, 그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정체를 육신 가진 인생들에게 밝히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비밀의 모든 것을 보여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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