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69-75 베드로의 부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27. 10:3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는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베드로도 있었다. 그런데 그 베드로를 몇 사람이 알아보고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고발하듯 말하고 나섰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사실을 부인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에 관한 것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가 죄인과 한 패라는 것이 들통이 나면 자신도 잡혀가서 매 맞고 죽을까봐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베드로가 그렇게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로 치면 독립운동 단체와 비슷한 열심당원으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까지 그 품속에 칼을 가지고 다닌 사람이다. 독립운동가가 독립운동하다 잡히면 해를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듯이 베드로도 적어도 그 정도 용기는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고발 앞에 그렇게 무너졌을까? 베드로를 고발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이 자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베드로의 부인은 “나는 함께한 사람이 아니다.”가 아니었다. 베드로가 부인한 것은 “저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였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얼굴을 몰라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베드로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을 받고 채찍을 맞고 있는 예수님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왜 저러고 있는지 그것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께서 왜 저러고 있는지, 저러고 있는 저 예수님을 자신은 이해할 수 없고, 그런 모습의 예수님은 자신이 모르는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변하면 못 알아본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육신은 같은 사람인데 전혀 다른 사람일 때 느끼는 그 생소함과 같은 것이다. 베드로는 지난 3년간 자신이 알던 예수님과 전혀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베드로가 알던 예수님은 베드로 맘대로 기대하고, 상상하고, 만들어낸 예수님이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예수님으로 알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서 우상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신데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형상이 없는 분을 형상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당연히 만드는 사람이 가진 하나님의 이미지대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상인 것이다.


그러니까 3년간 베드로는 예수님 우상을 섬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세상 사람들이 잃어버린 사람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는데, 베드로는 자기 맘대로 예수님이 유대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독립시킬 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그렇게 예수 우상을 섬기던 베드로가 자신의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독립은커녕 잡혀서 죽게 된 예수님을 보고 있으니 ‘저 사람은 도무지 무군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스라엘의 독립이라는 명제만 기대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할 수 있는 생명인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려고 오셨는데 베드로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알았던 것은 분명하다. 즉 예수님은 내용인 의와 생명을 전하러 오셨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적과 형식만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본질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에 관한 성경으로 설교하고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가르치지만 그 내용이 결국 사람의 행위나 소유나 육신에 관한 것이라면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육신의 것이라고 하니 속물처럼 돈이나 밝히는 것이라고 단정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믿어서 복 받겠다는 것,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교회가 세상에서 대우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다 예수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정체성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하나님의 의와 뜻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다. 놀라운 능력과 기적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이 있다. 사람은 그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가 짖는 것만큼 쉬운 것이다.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용도에 맞는 것을 하는 것은 아주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결국 자신이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신다. 그 사랑이라는 단어를 원문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시는 사랑은 처음과 두 번째는 아가페이고, 세 번째는 필로에이다. 반면에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로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처음 두 번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필로에 한 것을 주님이 아시나이다.”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결국 사랑하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확인사살처럼 “그래 네가 정말로 나를 필로에 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에도 베드로는 “그렇다.”고 답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을 아가페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랑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관계의 형성에서부터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의 전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지은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아가페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는 것은 좀 미흡한 것이다. 아가페 사랑은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고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필로에는 형제애와 같은 것이다. 형제로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아가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물음에 “아닙니다.”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은 예수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사랑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사랑을 보이셨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주님으로 사랑했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랬다. 아니 우리 모두가 그렇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가페 사랑을 보이시기고 있는 매 맞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것은 죄를 시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고백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그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새벽이 온 것이다. 즉 새 날이 온 것이다.


새벽이 오기 전에,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니 새벽이 왔다는 것이다. 새로운 날, 이제까지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 열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주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정작 자신의 육신도 나라도 구하지 못하고 오히려 매 맞고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런 예수님은 자신이 알던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예수님을 다르게 알고 있었노라 고백한 것이다.


이 고백은 배신 같지만 정말로 감동적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고 고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나 세상에서 성공해보겠다고 세상을 사는 중에 예수님을 만나면 예외 없이 예수님은 자신이 꿈꾸는 것을 이루는 과정 속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세례를 받듯 세상의 가치관에서 죽어나고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잘못알고 있었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형제애로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 과정은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과정이 없는 이는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이들에게 줄 것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정말로 감동이고, 그 누구도 그 베드로의 고백의 과정 없이 예수님을 바로 만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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