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께서는 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에게 가셔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일을 성경이 기록한 것은 소경, 문둥병과 같은 불치병을 고치시는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병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각양의 병은 하나님이 보실 때 온전하지 않은 사람의 다양한 모습이라는 것과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회복시키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만약 병자들을 고치신 일로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부각해서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면 그것은 성경을 아주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설교자 대부분이 이렇게 설교하고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 전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살려 놓은 사람 중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일에서 주목할 것은 장모라는 점이다. 베드로에게 장모는 여자를 낳은 여자다. 베드로와의 관계에서 그렇다. 그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여자와 같다. 이는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는 아들이란 존재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치 육신으로 여자가 남편의 유전자를 받아 남편의 아들을 낳는 것과 같다. 아니 육신의 이 일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법의 모형이다.

 

그런데 여자가 여자를 낳았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이 되지 않고 계속 사람이 옳다는 의를 좇는 사람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귀신 들린 자가 인생의 목적을 상실한 사람이듯 하나님 앞에 여자인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 역시 하나님이 보실 때 병이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외에도 많은 병자를 고치셨다고 마가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물론 다른 복음서도 그렇다. 앞서 잠깐 설명한 것처럼 병자는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모습이다. 병이란 것이 이상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이상하다는 것은 정상이라는 기준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가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 자기 정체성을 벗어난 것을 뜻하는 것과 상통한다.

 

굳이 건강의 문제가 아니어도 정상이라는 기준, 곧 존재의 목적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다 이상하고 아픈 것이고 죄다. 이동을 위해 만들고 구매한 자동차가 이동하지 못하거나 안정적인 이동을 할 수 없는 상태를 고장 났다고 하는 것처럼. 이같이 자기 존재 목적, 자신을 만들거나 구매한 존재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 죄고 병이고 고장이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뜻하신 것과 다르게 사는 것이 죄고 병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성경이 기록한 것은 예수님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으로 회복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과 늘 반대로 살아간다. 심지어 그 그릇된 딜을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기가 찰 노릇인데 사람은 그것을 좋은 신앙,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에게 기대하신 낮아지는 하나님의 본성을 보이시기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는데 사람은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열병을 앓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여자가 여자를 낳는 열병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낮은 자리, 십자가로 이끄시는 주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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