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자신의 장사를 위하여 향유 옥합을 깨트린 일이 있은 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셨다. 그 때는 유월절이라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을 보자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예수님을 아주 성대하게 맞았다. 그 환영이 대단했는지 예수님을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이 서로를 보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일이 다 쓸 데 없는 일이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그런 그들이 불과 며칠 뒤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환호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그것도 한 번도 짐이나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그 모습은 ‘호산나’라며 외치는 환호에 집중하다 보면 참 초라한 모습이라는 것을 잊기 쉽다. 예수님의 그 모습은 참 초라한 모습이었다. 다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기대로 인하여 예수님을 크게 맞이하느라 그 모습의 의미를 잊었던 것이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당시나 지금이나 나귀는 짐을 실어 운반할 때 이용하는 가축이다. 나귀의 목적은 고기보다 인간의 짐을 나르는 것이 더 우선되는 목적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섬기는 동물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나귀를 예수님께서 타셨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볼 때는 ‘이제 자기들을 해방할 메시아’로 또한 왕으로 환영하고 있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때까지 한 번도 없었던 섬김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타지 않은 나귀를 타신 것이다.


예수님을 열열이 환호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오신 것을 환호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환호는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구하고, 또 병들고 가난한 삶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능력을 있음을 오병이어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에서 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을 바꾸어낼 왕으로, 메시아로 환호하고 영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마음 혹은 목적과 같은 것이다. 다들 세상에서 예수님을 힘입어서 이긴 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힘입어서 자기가 가치롭게 여기는 일들을 이루고 얻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종교적인 가치까지.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세상의 권세에 져서 심문받는 꼴이 되고 나니 사람들은 분노했다. 자기들의 기대를 저버린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친 것이다. 차라리 강도를 살려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자기 기준으로 보고, 자기 기준으로 열광했었던 것이다. 정말로 눈이 바로 달렸었다면, 자기들의 기대를 이루어줄 왕을 맞이하려는 것이었다면, 황금마차를 타고 들어오는 이를 맞이했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섬김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주님을 자기들의 기준으로 본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이 정치적인 왕으로서의 예수, 민생을 해결할 신적 능력을 가진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기대하고 자기들의 기준으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환영했듯이 지금도 예수님을 육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신으로 자기들 맘대로 규정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렇게 규정하지 않았다면, 빌라도의 뜰에서 매 맞는다고 죽이라고 외칠 필요가 없을 테고, 예수님을 그런 신으로 믿지 않는다면 그것을 기도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해서 환호하며 환영하기도 하고 또 지금 믿고 있기도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셨다. 다시 말해서 섬기는 자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때껏 아무도 보여준 적이 없는 하나님의 의의 섬김을 보여주러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 해결도 아니고, 정치적인 왕이 되는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가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보이신 곳은 십자가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또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행동으로 말씀으로 보이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고서 정치적 해방,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는 메시아로 인식했다. 예수님의 겉모습만 본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만 본 것이다. 그래서 오병이어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을 때에 ‘기적을 인함’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신을 깨트리고 그 안에 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것이 향유 옥합의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신을 버리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 자꾸 형식에 관해서, 눈에 보이는 기적과 같은 것만 보고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그 육신을 옥합과 같이 깨트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눈에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이신 것이다.


그랬더니 처음으로 예수님의 기적이나 육신의 어떠함으로 인함이 아닌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온 것이다. 바로 백부장의 고백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대하는 모든 것이 다 무너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보았다는 것이다. 즉 육신이 되기 전, 아니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깨어진 옥합 밖으로 향유의 향기가 날리듯이 사람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 안에 있는 것임이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아닌 육신 안에 있는 것임을 아는 것은 신앙의 핵심이다. 이는 육신은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모든 것은 다 그 안에 있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반면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호하며 맞이한 유대인들과, 교회에 가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들의 진정한 정체성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신앙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섬김이란 바로 신앙이 없는 이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이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그 눈에 보이는 세계가 예수님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십자가에 처형하려고 할 때, 그렇게 죄인이 의인을 죄인 만들려고 하는 그 주장을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섬김인 것이다. 그 섬김이 없다면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불러 눈에 보이는 세상의 권세를 물리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섬김은 나의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의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인생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마음으로 보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으로 취급 받는 이 육신의 삶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오히려 의롭고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인데, 그것을 나타내심에 있어 ‘내가 하나님이니 시키는 대로 해!’가 아니라,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 의에 순종해서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섬김인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의에 순종한다는 것은 곧 죄인이 되고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된다는 것은 예를 들어 경제적 관점으로 보면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이고, 도덕적으로 보면 몹쓸 사람이 되는 것이며, 세상의 법률로 볼 때는 죄인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죄인이 되는 자리와 상황에 닥쳤을 때에, ‘어디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보고 이러냐?’가 아니라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끌려가서 옥합이 깨어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섬김이고 십자가의 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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