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6:19-34)
가끔씩 신학자나 설교자들이 성경 번역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성경을 읽고 있노라면 처음 번역한 사람들의 영적 안목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 마태복음 시작을 보면 개역한글판은 ‘아브라함의 자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되어 있는 반면, 요즘 사용하는 개역개정판은 ‘아브라함돠 다윗의 자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계와 계보는 참 다른데, 계보는 예수님이 이 계보에 속했다는 의미가 강하고, 세계란 열거된 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의미라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번역이며, 오늘날 번역은 거꾸로 된 형편 없는 안목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보다 신앙이 더 좋지도 않은데, 소용 없는 짓들을 많이 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초대교회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한 사람들이 마태복음 6장 19절 이하는 하나의 단락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냥 읽으면 여러 내용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보물에 관한 말씀, 눈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관한 말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이 하나의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로 연관성을 가진 구성이라는 게 놀랍습니다. 저작권으로 장사하려는 목적을 가진 오늘날 사람들에겐 없는, 성령의 감동이 초대교회 성도에게는 충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감해 보이긴 하지만 두 주인의 개념은 정치적인 비유가 이해하기에 좋습니다. 민주주의가 이념인 국민과 사회주의가 이념인 국민의 가치관은 완전히 다르고, 다른 가치관을 가졌으므로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삶의 양식과 행동도 완전히 다릅니다. 이 둘은 각각의 이념을 추구하므로 각각의 이념이 추구하는 이들의 주인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많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 경제평등과 사회복지라는 달콤한 말로 큰 정부와 많은 세금. 공동 분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끝은 사실상 공산주의라는 점에서 그들은 정치적으로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자유 민주국가에 산다고 사람에게 주인이 없는 건 아닙니다. 자기가 추구하는 것, 그래서 그 추구하는 바를 인하여 자기 삶의 일부를 구속할 수 있는 게 주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로 섬기기 때문에 남들 쉬는 휴일인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자기 주인을 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가치(관)과 이를 보는 안목입니다. 무엇을 귀한 보물로 보는지에 따라 섬기는 주인이 달라집니다.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의 선택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이렇게 주인이 확실한 사람은 그것에만 집중하지 다른 것, 대표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과 내일 일을 크게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덕후라는 사람들을 보면 이를 조금 엿볼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취미 생활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이 의식주를 해결하는 지출보다 큰 금액을 선행해서 지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헌금을 할 때 신권이나 십일조를 먼저 구분하는 것도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신앙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만을 유일한 주인으로 쉽게 섬기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아쉽게도 실상은 그렇게 단정하기 힘듭니다. 앞서 자유 시장경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정치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절묘함이 유사해서 다소 부담스럽지만 정치적인 비유를 인용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수익에서 십일조를 먼저 구분하고, 주일이면 새로 산 옷을 먼저 입고 예배 드리러 가는 모습들은 때로 외식처럼 보이긴 해도 정성스럽다는 점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을 귀하다는 것으로 정성을 다해 섬기는 목적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득이 하나님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있는 것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착하게 살고, 성공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와 믿음의 선진들은? 이게 바로 가장 확실한 사탄의 시험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번째 시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이 이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의 영광과 자신의 평안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두 주인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양이 그렇지 실제 주인은 세상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몸이 상한다는 말씀은 이렇게 무엇이 시험인지, 자기가 어떤 주인을 섬기고 있는지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어 어두우면 그 몸으로 살아가는 삶이 죄악이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렇게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므로 이걸 주인으로 섬기는 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므로 말 그대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모두 이방인입니다. 당연히 이런 신앙은 먹을 것을 구하려고 염려합니다. 세상 가치의 결핍과 부족으로 인하여 마주할 곤고함을 염려합니다. 내일 그렇게 될까 염려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주인을 섬기고 있는 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로 교묘합니다. 자유 시장 경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 불평등을 미끼로 사회주의를 추구하듯이 교묘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것 같지만 그 끝은 나의 이익과 세상의 성공에 있는 사탄의 계략에 속고 있습니다. 나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이야 말로 진짜 사탄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을 잘 돌아 봐야 합니다. 쉽게 구분이 되지 않아 보여도 이 신앙과 믿음이 누구에게 혜택과 이익이 있는지, 그게 정말 하나님인지, 부부 사이에도 지기 싫어하는 우리 마음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정말로 영광으로 아는지, 아니면 내가 지은 죄에 벌을 대신 받는 하나님의 아들로, 또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게 아닌지 정말로 냉정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이걸 바로 알지 못하면 세상과 하나님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물론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으니 세상을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보물에서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이 하나의 맥락으로 분류한 초대교회 선진들의 안목이 참 귀하다는 것과 함께, 그것이 예수님 말씀의 맥락이라는 걸 이해하고 깨달어서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 한 분만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그럼 우리에겐 무슨 유익이 있냐구요?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그의 영광에 참예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내 육신이라는 형식이 되는 하나됨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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