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의 잎사귀와 유대인의 경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행위적 경건은 오늘날 우리가 감히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유대인들의 이러한 경건한 모양을 끊임없이 책망하셨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유대인의 율법과 그에 따른 행위를 상징한다. 아담이 범죄 후 무화과 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던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로 하나님 앞의 수치를 가려보려 하는 시도의 근원을 의미한다. 잎사귀(행위)는 풍성하나 열매(생명의 본질)가 없어 하나님의 양식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저주의 대상이 될 뿐임을 예수님께서는 엄중히 보여주셨다.
이러한 성경적 맥락에서 볼 때, 바울 사도가 그레데인과 할례당을 가증하다고 비판한 이유는 그들의 행위와 생명이 불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유대인의 경건을 추구하는 듯했으나, 그 실질적인 목적은 자기 이익을 채우는 탐욕에 있었다. 바울 사도가 이들을 ‘가증하다’고 한 것은 어쩌면 그들의 실체에 비해 매우 정중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거듭난 생명 없이 성경의 가르침을 흉내 내려는 시도는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가증함에 속한다.
‘항상 기뻐하라’는 행위 규범이 아닌 생명의 상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와 같은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의 노력을 통해 특정 행위를 이끌어내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는 우리를 그렇게 기뻐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을 ‘거듭남’이라 부르는 이유다.
옛사람은 기쁨을 의무나 규칙으로 여겨 슬픈 순간에도 억지로 기뻐하려 노력했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은 본성 자체가 기쁨이기에 거듭난 자는 자연스럽게 기뻐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생명의 발현이지, 금도끼와 은도끼를 바라고 자기 도끼를 연못에 던지는 나무꾼과 같은 보상 심리적 순종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무감이나 복을 받으려는 욕망, 혹은 화를 피하려는 두려움 때문에 성경을 지키려 노력한다면 그것이 바로 바울이 경고한 가증한 모습이다. 속사람은 변하지 않았는데 겉으로만 순종을 연기하는 전형적인 외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한 삶을 권면하는 디도서를 묵상하며 "어떻게 경건하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기에 앞서, "어떤 생명이 경건한 삶을 본성으로 삼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생명이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 생명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리스도’이며, 성경은 이 생명과 거듭남 외에 다른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진정한 경건을 갈망한다면 우리는 먼저 진정한 거듭남을 갈망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쩌면 자기가 믿어온 거듭남이 허상이었음을 발견하는 아픈 경험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성경대로 살려 노력하다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예수님과 우리는 다르니 노력에 의의를 두자"고 타협하는 신앙은 결코 거듭난 생명이 아니다. 예수님과 본성이 다른데 어떻게 하나님을 같은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는가? 이러한 본질의 차이를 외면하는 것은 가증함을 넘어 양심이 마비된 상태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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