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딛 1:5-9) 거듭난 생명의 모범인 장로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디도서 Date : 2026. 5. 17. 19:10 Writer : 김홍덕

바울은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놓았는데 1 5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각 성에 장로를 세우려 함이다. 그렇다는 건 그레데에는 복음에 부족한 것이 있다는 의미고, 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장로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장로가 부족한 일을 바로잡는 열쇠이자 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레데에 부족한 것은 삶의 경건이다. 따라서 장로를 세워 그 부족함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경건한 장로의 모범이 성도들의 부족한 경건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오늘날 장로들이 어떤 지를 생각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오늘날 장로들이 그렇지 않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이런 대중적 인식은 우리 주변에 경건의 부족을 바로잡는 장로가 흔치 않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건 장로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와 성도 모두의 신앙관의 문제다. 교회와 성도들이 장로를 뽑아 놓고 비난한다는 건 자기 모순이다. 처음부터 바른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로를 생각할 때 우리가 긍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건 결국 교회와 성도의 책임이다.

 

디도서는 경건한 삶을 권면하는 말씀이며, 이 경건한 삶은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하는 건 이 경건한 삶은 신념과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간은 되겠지만 이것이 온전한 삶이 되려면 경건이 본성인 생명이 되어야 한다. 경건이 본성인 생명은 초식동물이 풀만 먹듯이 경건하게 살 수밖에 없게 된다. 바울 사도가 디도에게 세우라고 한 장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장로의 자격을 보면, 가장 먼저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럼 먼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부터 살펴 보자. 책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책망에는 기준이 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기준은 당연히 디도서의 기록 목적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장로라는 신분이 이에 합당한지도 함께 생각해 보려 한다.

 

복음으로 책망할 게 없는 생명

감독의 자격으로 언급된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는 가난이나 질병 같은 외적 환경이 아니라, 복음과 경건의 관점에서 평가되는 내적 지표다. 특히 이 조건에는 '항상성'이라는 엄격한 시간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상황에 따라 흔들리거나 순간의 충동으로 책망받을 행동을 한다면, 이는 성경이 요구하는 기준을 온전히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그렇듯, 이 절대적인 조건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단 하나, 우리의 '생명의 본성' 자체가 바뀌는 것뿐이다. 양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고기를 먹지 않듯,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리 잡아야만 비로소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이 유지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생명의 근본을 바꿀 기회가 주어졌다.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의 은혜다. '거듭남'은 단순히 행실을 고치는 수양의 차원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이 바뀌는 사건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그 본성이 성령을 따르기에, 하나님이 보실 때 항상 책망할 것이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된다.

 

한 아내의 남편: 단일한 의를 표현하는 일관된 삶

우리는 흔히 당시 사회가 일부다처제였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놀랍게도 당시 로마법은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이러한 법적 기준에서 볼 때 바울 사도가 장로의 자격으로 '한 아내의 남편'을 제시한 것은 보편적인 가이드라인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당시 사회는 엄격한 법적 규범에도 불구하고 첩을 두거나 노예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등의 부당한 풍습이 은밀히 용인되던 곳이었다. 따라서 이 권면은 그리스도인의 지도자라면 마땅히 사회의 타락한 관습을 멀리하고 정결해야 한다는 기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행간에 흐르는 남녀의 영적 개념을 심도 있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 관점에서 남자는 '()와 가치', 여자는 그 의를 외적으로 나타내는 '생활과 행함'을 상징한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앞에신부로 칭하는 이유 또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삶으로 표현해야 하는 존재라는 창조 목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표현은 단 하나의 불변하는 의를 일관되게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한 아내를 두었다는 것은 언제나 한결같은 삶의 행실을 유지함을 의미하며, 이러한 일관성은 그 바탕이 되는가 변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을 섬기다 이방 신을 섬기는 식으로 중심 사상이 흔들리면, 그 삶의 표현인 행실은 한결같을 수 없다. 중심이 흔들리는 사람은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이기 마련이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의를 표현하는 아내(행실)가 여럿인 상태일 뿐 아니라, 그 행동 속에 종과 같은 비굴함이나 방탕함이 섞여 나오는 부정한 상태와 같다.

 

물론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육신적인 혼인 상태와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의를 한결같이 표현하는 사람의 삶에는 본질적으로 여러 아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 유일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분의 의를 삶으로 번역해내는 사람은 아내가 여럿일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이 구절은 단순한 결혼 생활의 기준을 넘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의 일관성이 장로가 갖추어야 할 핵심적인 자격임을 말씀하고 있다.

 

믿는 자녀를 둔 자: 생명의 본성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

아내와 자녀의 됨됨이를 통해 그 가장의 인격을 가늠하는 것은 보편적 사회 통념이다. 가장으로서 가정을 어떻게 이끄는지 판단하는 것은 조직의 지도자를 세우는 데 있어 올바른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이러한 도덕적 관점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앞서 남녀의 관계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듯,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역시 하나님과 우리의 영적 관계를 투영한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아들로 거듭나는 것임을 상기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자녀는 아버지의 의가 육신을 입고 나타난 존재다. 성경적 정의를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의가 투사된 존재이며, 딸은 아버지의삶의 모양이 형상화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방탕하지 않고 순종하는 믿는 자녀를 두었다는 조건은 그 아버지의 신앙과 의가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방탕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좀 새겨보아야 한다. 한국어에서 방탕은 게으름이나 유흥에 빠진 상태를 폭넓게 의미하지만, 본문에 사용된 헬라어 원어 '아소티아(σωτία)'가 담고 있는 무게는 훨씬 심각하다. 이 단어는보존되지 못할 것’, 혹은구조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라는 의미와 함께 자기 파괴적인무절제를 뜻한다. 이러한 어원적 배경을 고려할 때, 성경이 말하는 방탕은 하나님의 의와 단절되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심각한 영적 파멸 상태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자녀의방탕불순종이라는 조건과 병행하여 생각해보면 명확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마디로 자녀의 의와 행실이 믿음과 무관하여 구원의 대열에서 이탈해 있다면, 그 아버지는 장로의 직분을 맡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 바울 사도가 제시한 장로의 자격은 그가 품은 (남편/아버지)’가 그의 삶과 자녀(아내/자녀)를 통해 믿음의 증거로 온전히 나타나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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