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은 몇 주기 같이 세지는 않지만 매년 같은 레퍼토리로 반복되는 신앙 절기다. 매번 삶은 달걀을 부활절의 상징으로 나눠 먹고, 특이하게 이때만 초교파적인 연합으로 지역별로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언제인지는 특정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다시 공중에 재림하시면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어렴풋이 믿는다. 그래서 예전 어른들은 자기가 죽은 뒤 예수님 재림 때 부활할 몸이 없어질지 모른다며 화장을 거부하기도 했었다. 썩어 없어지나 태워 없어지나 매 한가지인데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창조주께서 그 정도 능력이 없을까 적정한 셈이다.
이 블로그 역시 매년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부활절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핵심은 부활의 목적과 이유다. 다른 종교와의 특출한 차별화를 위해 부활이 있는 건 아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표현할 물리적 육신을 가진 존재가 필요했고, 그 필요를 인해 사람을 창조하신 건 불가피한 일이었듯이 부활 역시 그렇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에 부활하셨다. 우리는 이 이유를 잘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4)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 이 말씀이 부활의 절대적 필요성을 증명한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에 사망 가운데 있을 수 없다. 이는 백조인 미운 오리 새끼는 오리가 아니므로 오리 가운데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당연한 이치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말에 크게 낙심한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 그 자체라는 걸 말씀하셨다. (물론 제자들은 그 당시에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부활을 잘 모르듯이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사람이 부활에 대해 희미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건 부활의 필연적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과 자신이 당연히 부활의 대상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의 부족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살았다고 하시므로 죽음에 거할 수 없다는 확실한 부활의 필연성과 자신이 하나님의 그런 법과 섭리 안에 속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부활은 믿어야 하는, 또는 믿고 싶은 신앙의 기적이 아니라, 내가 존재한다는 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 것과 같은 믿음이 없을 수가 없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6,17)
우리는 부활을 예수님의 재림과 같이 일어나는 일로 믿는다. 그래서 죽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다는 성경 구절들을 달력의 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해서 ‘그때’ 육신이 살아 있는 행운(?)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느 날 정말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텐데 그때 육신으로 그걸 보는 사람을 두고 살아서 보는 사람이라고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이 다시 오는 것을 볼 사람이 있다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까 살아서 재림을 본다고 하신 말씀은 육신이 살아 있을 때가 아니다.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시는 생명이 된 사람을 말한다. 어느 시대에선 분명 육신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재림과 부활의 본질이 아니다. 그날은 부활과 재림의 본질이 현실로 표현되는 날일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 16:28)
하나님과 사람은 살았다는 기준이 다르다. 사람은 의학적으로 살아 있는 걸 살았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본성인 사람을 살았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본성이라는 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생명을 말한다. 본성은 생명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이 그랬듯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 곧 삶이 된 사람을 하나님은 살았다고 하신다. 그래서 육신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 세계를 성경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살아 있는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따라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의 주장에 자기 육신을 내어 주는 자기 의가 죽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망 가운데 두실 수가 없다는 걸 보이신 게 부활이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거듭났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라 언제나 옳고 선하지만, 놀랍게도 그 육신이 된 말씀이 죄인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생명이라 항상 자기가 죽고 낮아지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게 산 것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사망 가운데 둘 수 없으셔서 다시 살리신다는 걸 보이신 일이 바로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거듭난 생명으로 살다 보니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죄인인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주장에 내가 육신을 내어 주어 육신으로 수고하고 종과 같이 섬기는 죽음과 낮아짐으로 살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걸 믿는 것이다. 그게 진정한 부활 신앙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이 오시는 걸 볼 수 있는 먼 훗날로 예상되는 그날의 재림이나 부활의 날로 한정할 게 아니다. 진정한 재림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이 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그렇게 사는 삶은 세상이 보기에는 낮아지고, 자아를 죽이는 삶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진정 살아 있고 생명 있는 삶이라는 걸 믿는 것, 그것이 진정한 부활이고 부활 신앙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14)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미 예수님이 재림하셨고, 이 땅에서 삶이 천국인 사람이어야 천국에 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활한 사람이다. 그렇게 부활한 사람이어야 어느 날 예수님이 오실 때 부활할 수 있다. 이 부활의 필연성이 육신이 된 사람이어야 부활할 수 있고, 부활을 믿는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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