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은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사도 요한이 전한다고 하셨다. 전체적으로 요한 일서 5장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은 생명 곧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영생이란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개념은 객관적인 시간이 끊임이 없는 영원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나 상태가 초, 분, 시, 일, 년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간 개념을 크로노스적인 개념이라고 하는데, 객관적인 시간을 말한다. 즉 일반적으로 사람은 영원이라고 하면 무한대의 객관적 시간의 적용을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 시간은 그 자체로도 모순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나 영원함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예를 들어 천지창조를 예로 들어보자. 객관적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을 천지의 시작이라고 하면 시작 전 시점에 대한 개념도 있어야 한다. 즉 객관적 시간은 객관성 때문에 시작과 끝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라는 것이 육신의 삶이 객관적인 시간의 무한함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이라는 것은 어차피 객관적 시간의 차원 아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은 영의 시간 개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시간, 달력으로 표시되는 시간은 육신의 차원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영생은 시간의 영원성이라기보다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영생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믿는 상태가 곧 영생의 상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객관적 시간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시간의 시작을 태초로 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그 시간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시각 이전에도 계셨기 때문에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원성은 물리적인 시간의 개념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할 때, 이름은 그 생명의 정체성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정체성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 정체성은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사람의 정체성과 목적을 알게 하려 보내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아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 오셔서 하신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창조의 목적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법칙에 따라 이겨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의 법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사람은 언제나 패배자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사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생은 인생의 목적이 세상의 법에서 경쟁하여 이기고 그 안에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지어진 자신의 삶의 목적은 오히려 그런 것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의 법 앞에서 패배자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어떻게 영생인가? 또 패배자로 발견되면 망하는 것일 뿐인데,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이 바른 것이고 영생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는 앞에서 수 없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을 강함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으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자. 예수님은 세상의 법으로 볼 때,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나 유대인의 왕의 꼴이 아닌데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이를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끌어다 못 박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 여기셨기에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하나님 보실 때 살았다 할 수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지 못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훈을 따라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음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늘 표현했던 것이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삶이고,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세상의 법에 따라 경쟁해서 이기고 사람의 능력 이상으로 더 강해지고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의 원래 모습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듯, 그 연약한 육신의 한계와 주신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심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수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교회 다니면 다른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고, 더 예의 바르고, 더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안다. 그 모양은 옳다. 하지만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또한 세상에서 성공하면 세상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영광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연약하고 고상하지 못한 상태로 지으심은 그것을 극복하라고 숙제로 주신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극복하고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광이 된다면 올림픽에서 1등하거나 어떤 대회나 경쟁에서 1등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믿어도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연약함과 고상하지 못한 한계를 자랑하라고 주신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은 당연히 사람이 자긍하고 교만하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런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서로가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그래야 서로를 위한 마음과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경쟁하는 상대에게 사랑을 느낄 수는 없지만, 자신과 동일한 한계를 가진 상대에게는 사랑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이 가진 이 연약한 육신,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이 한계를 벗을 수 없음에도 그것에 메여 인생을 수고하고 짐 진 듯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수고로이 드리는 것이다.


그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보여주신 사랑이고, 또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본 사도들과 제자들도 어떻게든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육신의 모든 수고를 감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를 아는 사람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 동일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진정한 형제이고, 그 형제들은 이 수고로운 삶에 대하여 서로 알기에 서로 돕고 또한 사랑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실제로 십자가 밑의 백부장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은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사람에게 그 정체성을 알려 주기 위하여 그 사람보다 낮은 위치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겠는가? 신앙 없다고 배척하겠는가? 자기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이 불쾌하게 여길 일을 하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법으로 여기고 도덕으로 여기는 것을 이유 없이 어기고 무시하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죄도 없으심에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시기 위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고, 세상의 법을 무시하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악법도 법이라며 죽어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그들에게 있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 이상의 어떤 것을 보여야 한다는 것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런 것에는 목숨을 걸고 외치다 죽는 것이다. 그것이 순교인 것이다.


바로 이런 세계, 바로 이런 삶, 이런 생명을 가진 인생이 바로 영생을 얻은 인생이다. 이런 삶은 하나님의 법 안에, 하나님의 세계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이것이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당연히 영생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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