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장에 대한 새로운 묵상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29. 09:58 Writer : 김홍덕

수 많은 자동차 부품들이 생산된다. 그것들은 매우 엄격한 기준에 의하여 설계되고 생산되고 검사되어 제품이 된다. 가공되는 과정도 만만하지 않다. 어떤 것은 엄청난 고열에서 녹여진 다음에 모양을 갖추게 되고 어떤 것은 또 아주 빠르고 날카로운 바이트(칼)에 의하여 깎여서 제품이 된다. 그래서 그 하나 하나의 가치는 때로는 아주 높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떤 자동차 부품도 자동차에 결합되지 못하면 그저 가능성만 남긴 체 별다른 가치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동차 부품은 자동차 부품이기 때문이다. 자동차에 결합될 목적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경륜을 받는 것도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아주 가난한 조건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르고,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부유한 환경에서 그렇게 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험한 일을 많이 겪으면서 신앙이 자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좋은 부모 밑에서 안정된 생활 중에 신앙이 자라기도 한다. 그런 것을 보면서 먼저는 “Ego Eimi”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맞게 경륜을 하신다는 것이다. Ego Eimi는 ‘나는 나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경륜의 과정을 거쳐갈 때, 특히 곤고한 삶을 살아보면 “왜 내게 이런 일이?”라던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도무지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시길래 내게 이렇게 하시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륜 안에서 열심히 살다 보면 그 과정 과정에서 충분한 열매를 맺고, 또 그 안에서 교훈을 받아서 신앙이 자라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는 의문이 있는데 그것은 “이렇게 훈련만 하고 마는 것인가?’와 같은 의문, 다르게 표현하면 “언제까지 이렇게 연단만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 자신과 남들이 나의 경륜의 과정을 보며 교훈을 얻는 것은 좋은데 정작 나는 무엇을 얻는가? 하는 의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 참 곤고한 중에 탄식 같은 의문이다.(그러나 자기 육신의 삶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신앙으로 아는 이들에게는 무관한 일이다.) 나 역시도 행위로 의롭게 되는 Do와 Have의 신앙을 떠나면서부터 지금껏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이것이었다. 그리고 객관적 기준에 의하면 별거 아닌 것 같은 삶일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힘든 과정들을 겪고서 이제 돌아보니, 그 모든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려진 것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세계에 대하여 <비밀>이라고 하셨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내가 창조된 목적에 앞서 있는 나의 가치였다. 그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운동에서 경기를 이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기술을 보이려고 하는 것과 같은 모양인 것이다.

 

모든 인생의 가치는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그때 가치가 부여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세계에 대하여 눈을 뜨고, 그 세계의 창세기가 시작되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모은 인생의 삶은 서로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일서에서 요한 사도는 <사랑>이라고 했다. 즉,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알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다. 그것이 자동차 부품에게 있어 자동차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기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라고 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내가 하나님을 나타내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에 사용되지 못하면, 자동차 부품이 자동차 안에 결합되지 아니한 것과 같이 별다른 소용이 없다는 말씀인 것이다. 신앙 안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 어떤 힘든 과정을 거쳐서 그 안에서 교훈을 얻어 간다 해도 그것을 복음을 전하는 것에 수렴시키지 못한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교훈을 깨달았다고 해도, 또 어떤 승리가 있다 해도 그것은 자동차 부품이 단품으로서 가지는 가치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을 아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개인으로서의 가치를 공동체의 가치로 삶의 가치를 재조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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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하나님 안에서 살아오는 동안, 내가 복음을 전하고, 또 그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전하고 전하고 한다면 최종 유저(User)는 누구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다면 나에게는 어떤 유익이 있고,  복음은 전하기만 하고 결과는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새롭게 묵상해보는 사랑장에서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하는 말씀의 반대편을 보니, 무엇을 가치로 여길 것인지에 대한 새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안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도 본능처럼 알게 된다. 삶의 한절 한절 안에도 어떻게 보면 처절한 정도의 경륜이 있겠으나, 그것이 무엇이라도 하나님을 전하는 사랑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안식할 수 없는 삶의 과정이요, 목적이 없는 삶이고, 끝 없는 의문에 쌓인 삶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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