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대한 착각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4. 6. 28. 08:58 Writer : 김홍덕

최근에 세월호 사건과 관련하여 도피 중인 유병언이라는 사람이 구원파 교회 내에서 설교한 동영상이 간간히 뉴스에 나오고 있다. 어제도 어떤 프로그램을 보다가 한 커트 보여 주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출처 : 노컷뉴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잘못 했지만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어머니가 복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뭐 대충 저런 말이었는데,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내가 잘못했고, 그 대상이 어머니라 해도 어머니가 복음을 모르기 떄문에 잘못했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즉 복음을 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뭐 그런 이야기인 것 같다.


복음이고, 구원파고 뭐 이런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참 어이없는 말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말에 열광할 수 있다. 그 교회 안에 다니고 있는 사람으로 시부모나 또한 다른 가족과 갈등이 있을 떄 저런 설교를 듣는다면, 가족과의 갈등에 있어 자기가 선한 존재라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런 마음은 한번쯤은 가져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 역시도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다, '성경 말씀이 존재의 말씀이구나!, 믿어야 하는 사실을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나를 위한 말씀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복음임을 알았을 때, 유병언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복음을 정말로 모르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벗어나는데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결론적으로 복음이 복음다운 것은 깨달았다는 것이 남을 섬기게 하는 것이 되었을 때 복음이 복음다운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렇게 아는 것은 환상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같은 기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읽는 눈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마 20: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복음이든 하나님의 계시든 간에 먼저 알게 되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고 맘대로 비난해도 되는 자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을 섬기고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행복하게 하기 위한 수고를 감당하게 되어야 그것이 제대로 된 복음이다.


그렇게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표현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음을 먼저 알았다고, 잘못한 것이 분명하고 또한 어머니인데 복음을 모르니 무시하는 자격을 주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오늘 날 기독교가 사회로 부터 외면 받고 있는 것은 이런 태도에 기인함이 크다. 언제나 믿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 '지옥갈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고 대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느끼기 때문이다. 태도의 공손함과는 다르다. 부드러운 말이라도 일단 시작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복음이라는 것을 안다는 사람들도 이런 태도를 많이 가지고 있음을 봤다.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을 늘 꾸중하고, 보기만 하면 훈계하고, '그래 살아서 되겠냐?'는 맥락의 말들을 앞에서나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쉬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태도에 회의가 들었다. 하나님을 먼저 알았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복음을 가진 권리(?)라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것이 아니라 심판대를 이 땅에 만들고 사람들을 불러 늘상 꾸중하고 훈계하셨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늘 가까이 있고 문제 일으키는 제자들도 잘 꾸중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창녀나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결국 십자가를 지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훈계요 꾸중이고 섬김이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고 백부장에서 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고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가 아니라 이렇게 사는 것이다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도 십자가라는 극한의 모습으로 말이다. 


바로 이런 모습이 복음을 먼저 아는 사람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복음을 먼저 알았다고 복음을 모르는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또 누군지 알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인들을 싸잡아서 마냥 죄인 취급하는 것은 복음의 바른 모습이 아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복음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 주장에 매몰된 사람들을 긍휼이 여기는 것이지, 나이들고 어른이 되면 복음을 꺠달을 수 없다고 한정 짓거나 또 복음을 모르는 가족을 떠나야 제대로 교회 생황을 하는 것이라거나, 복음을 모르면 행복할 권리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복음은 먼저 꺠달은 사람이 깨달아야 할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와 세상의 관념에 찌들어 있어도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계층, 어떤 마음을 가진 부류를 한정 짓고 전도와 섬김의 대상에서 맘대로 제외하는 권리를 주는 것이 복음을 먼저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유병언은 이것을 몰랐다. 대부분의 이단 교주들이 그렇다. 먼저 남다른 계시를 깨달은 것은 가능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섬김을 받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고 꾸중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것으로 착각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이단이 되는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한다는 것이나,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세상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복음은 복음을 아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는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섬김이고 그것이 제대로 아는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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