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3-12) 썩지 않는 기업을 잇는 신앙

Category : 카테고리 없음 Date : 2017. 12. 29. 12:26 Writer : 김홍덕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존재의 목적이라고 하는 내용이 있고, 그 목적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한 모양과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드는 모든 물건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건의 외관이나 기능의 작동이 되는 것과 무관하게 자신이 그 물건에게 기대하는 바 목적이 성취되지 않으면 버리거나 중고로 팔아버립니다. 물론 때로는 그 물건이 가진 목적보다 더 중요한 목적(현금 확보) 때문에도 팔아 버립니다. 그러니까 모든 물건은 그 형상이나 기능이 본질이 아니라 기대하는 바 목적이 본질입니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주기적으로 바꿉니다. 핸드폰도 바꿉니다. 그 주기야 사람마다 다르지만 한 가지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동차나 휴대폰의 용도입니다. 즉 목적은 영원하지만 그 물건은 계속 새것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모양이나 형식은 다 썩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육신도 같은 법 아래 있습니다. 이 육신도 영원하지 않고 썩어질 자리로 가는 것은 이 육신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썩어질 것’이 무엇인지를 봐야 합니다. 즉 우리가 썩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은 그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휴대폰은 중고가 되어 썩어져도 그 목적하는 바는 항상 동일한 것과 같이 세상도, 육신도 다 썩어지나 그 이면에는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라고 하고, 특히 사람에 대하여 창세기에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소망이나 썩지 않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휴대폰에 기대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법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주관자라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는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므로 우리가 이 존재 목적에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아닌지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이 있으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행위 규범은 자연적으로 지켜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순종으로 알면 이는 휴대폰이 전원은 오고 불도 인터넷 검색도 되고 전화도 되지만 내가 원하는데 전화되지 않고, 원하는 검색을 제공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화나 검색은 잘 되지만 주인이 원하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하여 사람이 그 몸을 남을 위하여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문자를 제 아무리 잘 지켰다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에 순종한 것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이라는 것은 이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에 있어 아주 핵심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이것에 관한 것을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 달라고, 밥 달라고, 배우자 달라고, 합격 달라고, 사업 성공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썩어질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이며 당연히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소망, 그 산 소망, 생명이 있는 소망은 한 죽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가치관으로 볼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를 소망하고 그것을 본질로 여기는 사람의 모습은 실패자고 죄인이며 바보 같아서 그렇게 대접하는 그 대접을 받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대접을 받고,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곧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들의 법으로 볼 때 버릴 돌, 아무 쓸모 없고 그들의 목적으로 볼 때 죽은 것이라는 판정을 받는 죽음을 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 의가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본성으로 살아 가는 것에는 당연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전하는 말도 하고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자, 곧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며 기도할 때 썩어질 것을 구하여 그것을 받으면 세상에서 하나님이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들은 죽어야 할 죄인인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이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그 말씀의 본성대로 살았을 뿐인데,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자 곧 눈에 보이는 썩어질 것을 본질로 아는 이들이 볼 때 살려 둘 수 없기에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죽음이 오히려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기에 죽음에 둘 수 없어 살리신 것입니다. 아니 그것 자체가 바로 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치관에 따라 생명 있는 것으로 여기신 사건이 부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어 세상에서 쓸모 없는 취급 받는 죽임을 당한 적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부활이 없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구하여 그것을 받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신앙은 제 아무리 정통이니 나발이니 떠들어도, 제 아무리 신학박사에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라도, 또 심지어 자기 목숨을 그것을 전하는 것에 바친다고 해도 다 결국은 썩어질 것에 소망을 둔 부활이 없는 신앙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썩지 않을 것을 소망하는 온전한 신앙을 가지려면 눈에 보이는 세상은 목적을 표현하는 형식이라는 것을 깨닫는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 이후의 삶을 풍요하게 하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존재하게 하신 이가 뜻하신 목적에 순종하는 것이 있어야 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썩지 않는 기업을 잇는 신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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