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숙제와 같은 말씀이다. 실제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나?'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고 또 질문을 많이 한다. 이 문제가 아주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기도 하다.
원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나에게 행악한 원수에게 밥 퍼주고 발 씻겨 주는 그런 모습을 보이라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말씀의 실체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생명이 되라는 말씀이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 성경에 표현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율법적 관점에서 도전하면 어려운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다면 성경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에서 비롯된 행동 양식이기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참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이어진 말씀을 우리는 간과하면 안 된다. 그냥 살다가 나와 원수가 된 사람이 있는데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4-45)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따지고 들면 성경 어느 한 절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그 강렬한 말씀 사이에 눈에 크게 띄지 않는 말씀들이 아주 중요한 단서이고 열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한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말씀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빛을 비추고 비를 내린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을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사람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선과 악을 분리하고 선한 것만 추구하려는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자기의 하나님이 있는 것의 대칭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원수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 곧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와 유대 지도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도 기도하셨고, 또 원수 같은 그들을 대적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인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신 모습이다.
그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님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가진 가치관이 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가치관으로, 사람이 어떠해야 선하게 된다는 자신들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께 원수들이나 하는 짓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볼 때는 예수님은 정말로 악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 악함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스스로 왕이라 하는 반역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에게 '그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며 기도하셨고, 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를 찌른 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게 하여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는 사랑, 사람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알게 하는 사랑을 보이신 것이다. 즉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셨다는 것이다.
원수라고 하면 무협지에 나오는 '내 부모를 죽인 원수'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원수는 비단 그런 원수뿐 아니라 사람이 다른 사람을 원수로 여기게 되는 기본 이유가 있고, 그 이유로 인하여 서로 원수가 되는 모든 사람들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원수가 되는 모든 이유가 바로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하여 판단하고 그 중에서 악을 응징하고 선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그 선악과의 본성이 모든 원수 관계의 근본 원인이고, 그 마음이 드러나서 서로 원수가 되었을 때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또 자기가 정한 기준에 악하다는 것이 나에게 있어 그것을 죽이려 할 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보여서 그 사람에게 선과 악의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사람은 그렇게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는 것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사랑을 나타내라는 말씀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즉 이것은 악인이라는 것이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볼 때 악인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든 사람은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므로 죽은 자와 같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서 보신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악을 만드시거나 악인을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악은 모두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악을 뿌리 뽑고자 자행하는 것과, 선을 이루기 위하여 남을 죽이기까지 하는 선악과의 본성이 사람이 아는 모든 악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성들이 사람 사이에 원수를 만드는 것이다. 모든 사람 사이의 원수는 그렇게 생기는 것이고, 그렇게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의 과제로 삼고 실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개가 될 수 없듯이, 그런 생명을 가진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오히려 그렇게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것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싶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생명의 본성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 길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성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는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 사건에서 비롯된 원수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의 범주로 놓고 보면 오히려 일부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들을 말한다. 그 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사람에게 선을 이루기 위하여 또 자신이 생각하는 악을 물리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 원수가 되는 모든 인생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죄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긴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선하다는 것을 말하고 증명하기 위하여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사람에게 대항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죽을 것이다. 괴로울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죽음을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죽음이야 말로 살아 있다는 것이기에 살리실 수밖에 없으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런 죽음을 당한 나의 모습,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죄인이 되어 죽어가는 모습을, 선을 주장하고 나를 십자가에 끌고 가고 죽이려 하는 사람들이 보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하고, 자신도 그런 삶을 살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서 삶의 의미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죽인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감정적이고 사건으로 비롯된 사람 관계 안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정확한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한 탓도 있다고 봐야 한다. 예수님이야 말로 진정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신 분이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을 찌른 자들 까지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랑의 법과, 또한 그것을 깨달은 자들이 삶의 의미를 회복하는 사랑을 전하신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한다. 하지만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죄인이 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원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성은 어떻게 보면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적어도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정말이어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이 쉬운 것이 되어야 한다. 본성이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은 이유가 있다. 성경이 어떤 측면에서 보면 간증과 같고, 체험한 사람들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체험한 사람에게는 너무 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요원한 것이다. 수동 운전을 하는 사람은 경사진 곳에서 브레이크 없이 엑셀과 클러치만으로 정지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체험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도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분명, "왜 노력해야하지?"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음이 그러하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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