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도 다 아는 복수(?)의 규례인 <눈에는 눈>이라는 것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라>는 익히 아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예수님께서는 지금 율법에서 중요한 사항들을 다시 이야기 하시면서 어떻게 보면 더 지키기 힘든 법으로 바꾸시고 있다. 하지만 이건 율법을 지키는 행동 기준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율법을 완성시키는 것, 곧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어주라는 것이나 빌려달라고 하면 뭐든지 다 빌려주라는 것은 육신이 살아가는 것에 관한 규례나 재화나 감정이나 사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와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블로그의 내용을 보고 행여나 행동은 문제가 없고 의(마음)만 선하면 된다는 이야기인가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간음의 문제를 놓고 보자. '간음이라는 것이 정해진 내용과 형식이 아닌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육신의 간음은 간통법도 폐지된 세상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겠네?'라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성경도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심청전을 읽고 인신매매를 논하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간음이라는 것으로 보면 정해진 짝이 아닌 것과 연합하는 것은 비단 남녀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간음은 하나님의 의를 담아야 하는 사람의 심령 안에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는 것 그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육신으로 남녀의 문제에 있어서도 문제가 될 행동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간음이라 여기시는 것을 아는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의 모든 표현은 그 생명의 본성에 따라 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육신의 행동 강령이나 행동 기준으로만 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 곧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그 성품이 본성인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눈에는 눈으로 갚는 것이 모세의 율법이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오른뺨을 때리면 왼편도 대어 주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같이 가고, 무엇을 달라고 하면 주고,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이 행하기 쉬운 것이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게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이 말씀을 딱 들으면 이게 사람의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도 모르실리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떤 생명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악하다고 하신 말씀 중에 친구들이 들것에 메고 와서 지붕을 뚫고 내려서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심으로 고치셨다. 그때 이를 본 서기관들이 그 마음에 "어떻게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있느냐?" 생각한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그것을 악한 것이라고 하셨다.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 9:3-4)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악함은 행동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관에 있어 스스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사람을 규정한다는 것은 규정하는 기준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어떤 것이 선하고 어떤 것이 악하다고 스스로 규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악과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규정했을 때 이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청년이 찾아와서 "선한 선생이여" 했을 때,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반문하시면서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했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하여 함정을 판 질문을 할 때 예수님께 묻는 자들이 "당신은 참되시고(어쩌고 저쩌고)"할 때도 성경에는 "악함을 아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악한 것,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시는 악한 자는 한 마디로 선악과를 먹은 인생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 마음에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있어서, 자기가 생각하는 선함을 주장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 도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황에 따라 그 선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그렇게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엄히 금하신 것이라는 것에서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원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그들이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은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이 아주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에게 죄를 사한다고 하는 것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도, 또 율법을 몸으로 지켜내려는 것을 외식이라고 하신 것도 다 자신들이 가진 선의 기준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오리를 가자는 수준도 아니고, 오른뺨을 때린 것도 아니라 목숨을 내어 놓으라고 했는데, 그 때 예수님은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말없이 따라가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악한 자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한 사람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신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 보면 지금 눈에는 눈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오른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관한 말씀이다. 오른편이라는 것은 의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오른뺨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신앙을 시비 거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랬을 때 왼편을 대어주라는 것은 신앙에 대하여 시비를 걸어오면 왼편 곧 육신으로 살아가는 형식에 관한 것까지 희생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시비를 걸면 그 시비를 거는 사람이 감동할 수 있도록 육신의 삶을 살아내라는 말씀인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은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나온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절실한 말씀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 경제적 부족함이나 사회적 부족함을 시비를 거는 것은 그래도 용납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 시비를 걸면 웬만해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많은 경우 이것에는 사생결단을 낸다. 그래서 신학생이 데모하면 말릴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다닌다고 시비 거는 주변인들에게 단호하게 대응하기도 하는데, 그런 모습들은 하나같이 눈에는 눈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모르는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하나님을 가장 온전히 알았던 분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자기 말을 하려하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신앙이 좋다고 할수록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알수록 신앙에 대하여 오류라고 생각되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에 가만히 있지 않고 거의 사생결단의 각오로 그 문제에 대응한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불법 소프트웨어를 쓴다거나 교통 위반을 했다거나 하는 것에 대하여는 오히려 자랑하듯 떠벌려도 문제되지 않지만, 신앙에 대하여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용서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교회 세습이나 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뭐라고 하면 교회의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며 대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악한 자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군사봉기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이기지 못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오른뺨 곧 신앙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악한 자에게 왼뺨 곧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삶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십자가에 달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사람들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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