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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신앙의 타락과 변질을 이야기하면서 결혼을 비유했다. 신앙의 타락을 기혼자의 불륜이라고 한다면 불륜이 결혼을 해야 해당되듯 신앙의 타락도 제대로 된 신앙을 가져보기라도 했을 때 해당된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로나 알고 육신이 바라는 대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 빌던 신앙의 세계가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그것은 타락조차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칙대로 공부하고 경쟁하여 이긴 자가 목사가 되어 만든 교회는 그 바라고 간구하는 바가 결국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가치관 위에 있다. 그것은 더 크고 위대하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를 더 크고 아름답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교회에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것이 자랑인 것도 그렇다. 하나님이란 절대자를 믿으니 모든 것이 다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특함 같지만 말구유라는 자리에 하늘에서 땅으로 오셔서 세상 최악의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런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데도 그러고 있다.


그런 가치관에서 예수를 믿다보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경쟁에서 차별화되는 것이고, 그 차별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종교적 규범의 엄격함과 경건함을 내세워 세상의 사람들이 다들 노력하지만 이루지 못하는 도덕적인 성과나 세상적인 모범을 예수 믿는 사람, 정확히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해 내었다는 것에 두고 있다가, 그 행위가 무너진 것을 우리가 과연 타락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들, 장로교나 감리교나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나 다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와 같아서 그들의 타락은 타락이라는 불륜이라고 할 수도 없고 단지 문란한 사생활과 같은 것일 뿐인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믿어본 적도 없는데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타락한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타락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떠나 논리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적어도 타락이라고 문제시하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믿어 보기라도 해야 한다. 존재의 하나님께 가서 자기 행위를 드리고 눈에 보이는 형식과 세상의 외식에 대한 평안과 성공을 얻으려하고 그것을 얻는 것이 하나님께 복 받은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라 여긴다는 것이 가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래지 신앙 생황이 아니다. 하나님께 성경을 종교적 규범으로 지켜내는 공로를 드릴 테니 반대급부로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 그리고 사후에 천국까지 보장해 달라는 일방적 거래 요구사항에 불과한 것이다.


불륜이란 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것도 어떤 자격을 갖춘 자가 저지를 수 있는 일이듯 신앙이 타락하려면 어쨌든 제대로 된 신앙을 한 번이라도 가져봤을 때의 이야기지, 존재의 하나님을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으로 섬기고 그 드림의 대가로 영생복락과 부귀영화를 청구한 신앙 세계에서 요구된 종교적 규범과 엄격한 도덕, 사회적 규범을 어긴 것은 타락을 할 수 있는 자격도 아니라는 것이다. 



타락을 이렇게 ‘타락’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를 기준으로 보면 이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타락과 변질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앞서 이야기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의 신앙인들보다 더 엄격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온전하게 지켰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들을 보고서 늘 타락했다고, 죄에 빠졌다고, 또 음란하다고 책망하시고 벌주시기를 일상으로 삼으셨다.


불륜이라는 것은 자기 짝이 아닌 것과 상관한 것을 말한다. 타락도 그렇다.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벗어난 것에 의미와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본다고 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에서 바로 믿지 못하는 자리로 변질된 것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믿는 자리에 이르지 못한 그 모든 것을 죄악으로 규정하시고 방탕하고 간음한 여인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으로 섬기는 것이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종교적, 사회적으로 엄격하고 경건한 규율을 지키며 남을 위한 희생을 하는 것으로 아는 것과 같은 것은 사람이 보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런 삶의 모습은 모두 타락이고 음란이라는 것이다. 종교적 규범을 지켜서 본을 보이고, 선한 공로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에 합당한 존재가 먼저 되었는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났기에 그렇게 사는 것 외에 없어서 그러는 것인지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유일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에 그 육신이 어떤 성과를 내기를 기대하셔서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것을 기대했는데 육신을 이렇게 약하게 만드셨다면 하나님은 옹졸하거나 무능하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람이 가진 이 육신은 세상의 생명 존재들 중에서 힘과 능력에 관해서 무능한 편이다. 그럼에도 모든 동식물 최상위에 있는 것은 힘과 능력으로가 아니라 지혜, 특히 자아 인식을 바탕으로 한 존재에 대한 고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란 존재는 DO로 승부를 하여 이기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실존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해 하나님의 힘을 빌리려 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대하시는 분도 아니고, 사람을 그렇게 만드신 분도 아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정체성이 그것을 기뻐하시거나 의미를 두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다른 신을 믿듯 하나님을 믿는다. 존재의 신께 가서 DO를 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음란하다고, 타락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하나님을 존재로서 만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하려고, 무엇을 드리려고 하는 모든 것과, 그 반대급부로 영생과 구원과 평안과 성공을 바라는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근원적 타락이고 사망이며 죄의 상태다. 제 아무리 하나님께 경건하게 나아간다고 해도 그 목적이 여기에 있고, 가치관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그런 상태면 제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소용이 없다. 이것은 비유컨대 간첩이 온갖 선행과 봉사를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집에서 키우는 개가 사람의 말을 한다면, 더 나아가서 자기 존재 자아에 대한 철학적 묵상을 한다면 그것은 잠시 신기할지는 몰라도 아주 무서운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사람도 마찬 가지다.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만들었는데, 그래서 사람이 보기에 연약하게 보이지만 사랑의 하나님이 가진 사랑이라는 성품을 표현하기에 연약함이 너무 적합해서 그렇게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더 강해지고 높이 올라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여기며 노력하고 있으니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잘못된 것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망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다. 죄는 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남을 위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이나, 세상에서 지탄 받는 타락한 모습을 보이거나, 영적인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에 놀랄만한 일들을 밥 먹듯 해 낸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타락 이전에 사망의 상태고, 목적을 상실한 무용지물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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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그 존재의 실존적 가치의 심판 기준이 됩니다. 시계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는 시간을 제대로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 기본적인 가치를 발휘할 수 없다면 외관의 어떠함이나 이런 것은 더불어 가치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특히나 사람이 만들고 사용하는 모든 것이 그러한데 단 두 가지가 그 존재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 자신과 자신이 살고 인식하는 세상, 그것입니다.


사람과 세상은 사람의 손에 의하여 만들거나 의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인생을 선택하거나 결정해서 시작한 이가 없고, 세상은 의도하지 않게 시작한 인생이 시작되고 인식되면서부터 인지하게 된 존재고 공간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의 존재 목적을 자신이 육신으로 살면서 다루는 모든 것과 같이 알려면 사람과 세상에 대한 창조주 혹은 주권을 가진 이를 인정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다루는 진화론이나 생명 연장 이론과 같은 가설 혹은 이론이나 기술들이 가장 큰 허점이 바로 목적입니다. 진화는 생존을 위하여 전개되었다고 한다고 쳐도 왜 생존하려 했는지, 왜 더 나은 생명이 되려 했는지를 알 수 없고, ‘인생은 고(苦) 혹은 무(無)’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육신으로 더 살려고 하는 것도 그 목적이 모호합니다. 요즘 회자되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사람을 지배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들에 한 과학자가 답하기를 ‘그렇게 되려면 인공지능이 자아를 인식해야 한다.’고 답했는데 아주 훌륭한 답이고, 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좋은 답이기도 합니다. 물론 기술이 발달해서 자아 인식에 가까운 의사 결정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이 생길 수 있지만 그 또한 자기 자신의 존재 목적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니 인공지능이 투표권을 가진다거나 설교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흉내는 몰라도 가치를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인생이 알 수 없는 자기 존재의 목적을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인간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시작이 바로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셨다는 것을 단초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여정의 시작인 것입니다. 사람이 그러하듯 만들었다면 분명히 목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사람이 무엇을 만들 때 목적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조차 하나님이 그 품성을 가지고 만든 결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시작이 땅(사람)이 혼돈하고 어두운 중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시작되는 것은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자기 믿음으로 순종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 있는 것이 인식되는 세계가 열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든 천지’가 되고, 빛은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시작이고, 그 시작은 인생의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것이니 목적을 상실한 사망의 상태에서의 회복이기에 구원이고, 하나님의 의도된 목적 안에서 살았다는 기준으로 회복되기에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정체성, 곧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이며 그 생명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리스도 신화에 나오듯 신들이 세상의 여자를 취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들이란 그 아버지가 가진 의도가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합니다. 존재가 되는 법은 생물학적인 생식이라는 방법이 기본이지만, 우리는 세상에서도 아버지가 가진 의와 업을 잊기 위하여 아버지가 그 가진 뜻을 잘 구현할 사람을 아들(양자)로 삼기도 하듯, 우리 모든 인생도 하나님이 의도하신 의, 곧 사람을 지은 목적을 자기 인생으로 표현해 내는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아들이요 양자며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인생이 가진 육신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것을 보이러 오신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한 것이 또한 그것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곧 내용과 목적이 우리 육신의 삶과 하나가 되는 것, 곧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가 되어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며,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모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인생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로 하나님이 뜻하신 의에 있다는 것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음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순종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면 사람도 세상도 온전하다고 믿을 것입니다. 


단지 사람은 그 하나님의 경영 아래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순종하는 삶을 살 뿐. 그 순종을 위하여 육신이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움직이고 소비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드리기까지 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우리 인생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그렇게 살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맞는 시계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은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시계가 가지 않는 것과 같이 인생이 그 창조 목적을 상실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인생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고, 그 목적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곧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과 같이 인생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것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생들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살면서 알게 된 이는 생명의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자기 육신으로 인지하고서 하나님이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으로 살 동안 그런 삶을 버리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자기 육신으로 본 것 중에서 택하여 옳게 여겨 그것을 좇아 사는 육신의 정욕으로 산 자들은 그 육신을 벗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것을 알게 하실 것이니 곧 심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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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4:1-6) 심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5. 20. 10:40 Writer : 김홍덕

흔히 기독교인들은 세상은 방탕하고 연락에 빠졌기에 세상은 죄악에 빠져서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보다 더 열심히 세상을 삽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 간 그 시간 동은 일을 하거나 가족을 위해 헌신하거나 심지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 봉사도 하니 그 차이 정도로 더 열심히 살기도 합니다.


다만 사회의 일부인 유흥과 연락의 세계에 대하여 신앙이 허락지 않으므로 그 문턱을 넘지 못하도록 그 세계는 곧 지옥의 관문이라는 문지기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사들에게 노래방을 가면 죄인지, 술 마시면 죄인지 묻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술 마시는 세계 노래방 아니 주점을 넘어서는 것이 죄인지 묻는 다는 것은 종교가 그 문턱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가진 도덕성은 사실 그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을 연락과 방탕의 세계라고 주장하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구분하는 큰 경계가 바로 사회에서 흔히 ‘밤 문화’라고 하는 세계에 대한 유혹을 이기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과 같은 것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세상을 열심히 사는 것에 있어서는 교회에 빠져서 생계를 멀리하는 방탕이 있다는 것은 외면하고 감추고서.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그런 세계라고 한정하고 자신들은 그런 삶을 떠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 노력이 바로 신앙생활이며,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사는 동안 복을 주시고 죽어서 천국이 이끄시는 보상으로 돌아온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윤리규범이지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시고 인생을 주신 의와 뜻의 본질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음란은 사람이 그 존재 목적과 다른 것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로 삼은 삶 전부가 음란이고 음행이며, 정욕은 육신이 그 눈에 보이는 평안과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며 추구하는 모든 것이며, 술 취함은 육신의 제어와 즐거움을 하나님의 의가 아닌 술에 위탁한 것이며, 방탕은 제 일을 하지 않고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모든 것이며, 연락은 이유 없이 조작된 즐거움이니 하나님이 주신 삶의 의미로부터 오지 않는 모든 즐거움이며, 돈이나 권력과 같이 하나님이 인생을 주신 의와 뜻이 아닌 것을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여 좇는 모든 것이 우상 숭배니 이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생명의 법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께서 죽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이 바로 이방인의 뜻을 좇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윤리적인 기준이나 종교적 기준을 자라 지켜낸다고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회의 밤 문화를 즐기지 않는다고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앞에 죄고, 이런 상태와 마음을 가진 자가 사회가 말하고 세상이 정한 법을 어겨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존재 본질을 떠나서 제 아무리 선한 짓을 해도 그것은 간첩의 선행 같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죽음의 상태에서 사람들이 생명을 얻도록 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피가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전하신 것은 우리가 윤리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또 종교적 규범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십자가 그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은 생각지 않고 단지 윤리적이고 종교적 규범을 잘 지키면 이방인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의와 뜻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까지 보이셨으니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서든 죽어서든 자신의 삶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의 비교하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 그 자체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면서 또한 모두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심판이라고 하면 사람이 살 동안 하나님이 명한 계명을 얼마나 지켰는지 셈하는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행위에 대하여 심판하신다고 하신 적도 없고, 오히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말을 포함한 행위로 인하여 심판을 받아서 십자가에 달리신 죄수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람들이 ‘너 그러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행위를 가지고 심판을 논하는 것은 정말로 어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대세인 듯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전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드려서 인생의 내용 곧 영에 관하여, 이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드리시고 그 영이 육신을 떠나시는 십자가의 사건이 모든 사람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셨는지를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전하심은 지금, 시간적으로 예수님 당시가 아니라 우리 모든 인생의 오늘이라는 의미이고, 그 순간 육신의 살고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자나, 죽었다고 하는 자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그 죽으심으로 전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전하심은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존재, 곧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삶의 근원이 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a christ)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셨는지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정체성으로 이 땅에 오시므로 그 정체성이 모은 인생의 심판이요 기준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정체성을 자기 존재의 목적으로 삼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로 구분이 되는 기준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그 심판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는 이 심판이 생명을 얻는 것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사망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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