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대로 제자들이 할 것을 부탁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요 13:20)

라고 하셨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이신 섬김을 부탁하시고,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서 그 제자들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많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 같아진다는 것에 대하여 심히 경계한다. 이것은 물론 많은 이단들의 교주가 “내가 예수다!”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들을 많이 한 탓에 경계하는 것이 누적되어 그런 면도 있지만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인 탓이 핵심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제자들에게 ‘내가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하신 것을 생각해보자. 그 말씀이 ‘앞으로 너희들이 모일 때는 항상 서로 발을 씻기도록 해라’라는 말씀일까? 그것을 그렇게 받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행동을 따라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성경을 대할 때에 그 말씀을 그대로 행동으로 지키려고 한다. 십일조를 내라고 하면 수익의 1/10을 헌금으로 내라고 한다. 그런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도무지 1/10의 기준은 뭔지, 또 수입은 어디까지가 수입인지도 알 수 없는 미련한 인생들이 그것을 행동으로 지켜야 한다면서 1/10의 기준과 수입의 정의에 대하여 서로 싸우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들은 모두 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성령의 9가지 열매도 그렇다. 열매가 어떤 것인지도 모른 체, ‘예수 믿으니 9가지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열매가 뭔지는 알고 그러는가 싶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니, 또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니 마음에는 기쁨이 없고, 원망뿐인데도 행동으로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억지로 하면서 행동으로 그렇게 하다보면 그런 사람이 된다는 궤변으로 가르치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인척 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단언컨대 영접이 뭔지 믿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이 다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함을 전하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개체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유가 우리에게도 있음을 알게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것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 ‘너희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것과 같이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신 제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섬김으로 서로를 섬기는 이들을 영접하는 자들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섬김은 앞선 글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바로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의 삶이라는 것은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고, 그 이유가 그 이유를 안 이후의 삶을 변화시킨다면 분명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섬김의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필연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잉테되고 나는 것이며 낳아진 이상 그 생명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자기 삶의 이유와 목적과 의미가 된 사람을 보고서 그 사람의 삶을 영접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는 삶이 되려면 한 사람의 삶이 자신에게 그리스도 곧 메시아요 구원자로 영접되어야 비로소 예수님을 영접하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전환이 있어야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고,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를 나타내시려 하셨다. 그러니까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규정했다. 그래서 십계명의 첫 계명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규정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자기 맘대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벨탑을 쌓듯이 사람을 연단하고 훈련하고 사람이 가진 육신의 한계, 어리석고 부족하고 연약함을 넘어선 공로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사람의 모습을 스스로 부족하다고 또 부끄럽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사람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율법을 지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그러라고 지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알려주기 위하여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또 하나님을 자기 맘대로 규정한 인생들이 멸시하는 육신을 가진 체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는 죄인이 되고,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의 공로로는 죄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심으로 보이시고, 또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관으로 도 세상의 가치기준을 이길 수 없음을 가시관을 쓰심으로 보이셨고, 또한 세상의 신분이나 권력으로 이길 수 없음을 발가벗음으로 보이신 것이다.


바로 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모습 그대로가 세상의 가치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그 십자가의 모습을 보고 들을 때에,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말씀이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같이 하나님의 그 말씀이 자기 삶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성령께서 감동하게 하심으로 말이다. 그것이 성령의 잉태하심인 것이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섬김이 바로 자신이 섬겨야할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보고서 또 다른 사람이 그 섬김의 삶이 바로 자기가 살아야 할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닫듯이.


바로 그렇게 될 때, 그러니까 한 사람이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삶을 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가 열려야 비로소 천지창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의 본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들이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적선을 베풀 듯이 하거나, 또 교회 안에서 신앙적 우위를 스스로 점한 직분을 가진 자나 또 신비한 은사를 가지고서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고 훈계하며 교훈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상의 많은 것이 그렇듯, 더 가지고 더 알게 되는 것의 유일한 의미는 가지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가지지 못하고 모르는 자들이 가지고 알게 되도록 하는 것은 적선하듯이 하는 것도 아니고, 훈계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안다면, 자신이 아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 종으로서 주인의 발을 씻기듯이 예수님을 모르고 믿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주인과 같이 섬기고 발을 씻기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온전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신앙이 없음을 심판하고, 훈계하듯 하며, 꾸중하고,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의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며 뭔가 대단한 것을 아는 것과 같이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모두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지 신비한 능력이나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두움일 뿐이다. 괜히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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