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1. 8. 13:37 Writer : 김홍덕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이라는 단서를 붙이시고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고 하셔서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먼저 엄청난 사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지신 십자가’라는 것도 그렇고, 십자가의 형틀이 가진 형벌로서의 공포와 고통은 육신을 가지고 바늘에라도 찔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끔찍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면서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한 사람이 그 고통을 대신 감수했다는 것이 그렇다.


그런 탓인지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스케일이 자못 크다. 마치 인류를 구하는 영웅과 같이 신앙적인 큰 역사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고, 할 상황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행운 같은 은혜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만, 문제는 누구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복음이라는 것이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인데,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있어서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십자가를 생각하는 시작점의 하나여야 한다. ‘너는 질 수 있는데, 나는 질 수 없는 십자가다’ 라면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한 복음을 전하러 오신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 이상의 사람에게는 질 수 있는 십자가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온 인류를 위하여 오신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세상도 공감하는 위대한 헌신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보잘 것 없고 미약한 사람 역시 질 수 있는 십자가이어야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이다. 그래야 모든 인류를 위한 십자가고,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이 공의의 십자가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질 수 있다는 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는 죄인의 형들이다. 죄인을 벌하는 기구라는 것이다. 그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졌다는 것은 예수님은 그 형틀을 적용하는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을 죄인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형을 집행하는 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은 죄인이 된 죄목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했다. 즉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죽을 죄인이라는 것이다. 정확히는 유대인의 왕이 아닌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세부적인 내용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정치적으로 본 반역의 죄 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더니 죽어야 한다며 죽인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죄목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이기실 능력이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바다 위를 걷고, 죽은 자도 살리신 분께서 정작 자신이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는 그 능력이 다 어디 가고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돌아가셨는가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하시려 했는데, 정작 당사자이자,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아는 아들 본인이 죽어 버리면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전할 것이냐 하는 것도 생각지 않고, 그 많은 능력들을 뒤로 하고 그냥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하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는가?


바로 이 의문이 해결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절대로 그 본연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의문이 바로 십자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의문을 가진 채로 십자가를 지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 그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 그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는 것, 그래서 죽을 죄인이 되어 자신의 육신을 그 죄의 값으로 내어 주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뜻의 본질인 것이다. 그것도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이 되어서 죽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죽으실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일반적인 가치관이나 상식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죽으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이심으로 자신을 믿게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 계획과 법은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죽임을 당하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법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 법이 바로 십자가의 도고, 하나님의 계획이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육신이 운명적으로 십자가를 질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은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가 있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르게 표현해 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죄인이 의인이 되게 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온전한 의인이신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인이 의인인 예수님을 죄인이라 하는 것을 감당하시고 죄인이 되셔서 돌아가셨는데, 그 모습을 보고서 죄인이 예수님과 같은 의인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보면 십자가는 진정으로 죽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죽음은 육신의 죽음은 아니다. 이 죽음은 의에 대한 죽음이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의, 즉 ‘이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온전한 의를 가지신 분이지만 그것을 나타내시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르고 모욕했다고 하는 죄목을 순종하신 것이 그것이다.


의가 죽는다는 것은 그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 아니 사람이 가진 삶의 모든 영역에 의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은 자기 삶의 모든 부분에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오셨다는 것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모든 곳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이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의의 죽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의의 죽음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고 가는 모든 인류의 모든 삶의 영역 그 이상의 범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신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그 오신 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본체임에도 그 의를 주장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모르는 죄인들의 법 앞에서 죄인이 되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의가 죽으신 것이다. 사람은 그 어떤 인생도 이와 같은 범위를 넘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생의 의가 죽는 것 이상이기에, 인생의 모든 허물을 덮으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의의 죽음 그 이상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자신의 의를 죽이고, 분명히 자신이 가진 의가 더 온전함에도, 그 의를 모르는 이들의 의 앞에 온전히 죄인이 되는 삶을 육신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람이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의의 충돌 앞에서 죄인이 되어 자신의 육신으로 수고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삶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소금에 찍어 먹자는 아내(남편)의 뜻에 따라 주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런 작은 삶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의 시작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십자가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의아하게 생각한다. 먼저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렇게 작은 일이겠는가 싶은 생각부터 한다. 그러나 이 글의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일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1+1을 계산할 수 없는 사람이 미적분을 할 수 없듯이 삶의 그런 작은 부분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있어 가장 핵심은 남을 위하여 그렇게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고 헌신하는 것이 가진 방향성이다. 즉 사람 안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있어서 그렇게 산다면 그것은 온전한 십자가의 삶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십자가의 삶이라고 하니 자기 안에 그렇게 살 이유나 생명도 없으면서 그렇게 사는 것은 바로 외식이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떻게 사람 안에 있게 되는가? 그것이 바로 성령의 잉태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잉태되듯 심겨지고 그것이 자라서 육신이 되는, 즉 자기 육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되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이 없는데 아무리 남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삶, 십자가를 지는 삶의 모양을 보인다 해도 그것은 모두 소리 나는 꽹과리와 같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면 온전한 의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가진 하나님 앞에서 죄악 된 의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심과 같이 자기 의를 죽이고 자신의 육신의 수고를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사람의 헌신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질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성경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늘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겠는가? 세상은 고사하고 자기 속도 시끄럽지 않다. 자기 생명이 그래서 그런데 왜 억지로 하며 속이 시끄럽겠는가? 고양이가 ‘야옹’하는 것이 짜증나겠는가?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서 남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육신의 삶은 자신에게도 힘들지 않고, 세상도 혼란스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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