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육신과 삶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이다. 그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아들이거나, 능력으로 아들이 된 것이라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심으로 아들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에 대한 착각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생으로 오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걷는 그런 능력은 육신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냉 말씀으로만 해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굳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것은 한 마디로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십자가를 질 수도 없지만, 설사 그렇게 하셨다고 해도 우리는 그렇게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에는 육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십자가라는 형틀을 지기 위하여 육신이 필요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십자가를 지려면 육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실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육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그 존재의 목적을 십자가로 보여주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니려고 하니 가정에서 반대가 심하여서 따로 독립해서 살기로 했다. 그렇게 살아보니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부모님이 챙겨주다가 혼자서 알아서 하려하니 힘들었다. 그래서 그런 삶을 교회에 가서 이야기 했더니 ‘신앙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라면 위로했고, 그 사람도 교회도 그것을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반만 맞다. 진정으로 육신을 잘 사용하는 것은 그 육신으로 수고하여 모든 가족이 그 수고에 감동(이것이 성령의 감동)하여 같은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때 정말로 그 육신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산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십자가는 위대한 것을 위하여 감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위대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하지 않는 하찮아 보이는 수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그 수고를 감당하기 위하여 육신을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을 본 백부장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게 하는 감동을 주었듯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가족도 등지는 위대한(?) 결단이 십자가가 아니라, 가족을 감동시키는 수고, 그것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심판이 있다. 예수님의 심판이 바로 이것이다. 육신의 존재 목적과 사용법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바른 표준을 제시하심으로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이들이 그릇된 길에 있다는 것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심판은 사람을 세워 놓고, ‘넌 언제 이런 일(do)을 했으니 어떻게 처분한다.’라든가, ‘넌 언제 나에게 이런 것을 바쳤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벌을 주마.’와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법과 의미를 온전히 보이심으로 스스로 그 표준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는 심판이 바로 예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심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그 육신을 가지신 삶으로 보이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람의 존재 목적과,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의를 벗어나게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잘못된 것임을 드러나게 하심이 심판이니 당연히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모든 심판의 권한을 위임 받으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과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오해한다. 특히 교회가 그렇다.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그 가치관으로 심판이라는 것을 보게 되면 사람의 행위를 법정에서 재판하듯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아마 마르크스일지도 모른다.


심판이라는 것은 ‘넌 이런 것을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평가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모습이 창조주가 주신 삶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는 삶을 육신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에 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깨달으라고 그렇게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기에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잔을 물려주시기를 기도하시고도 그냥 털 깎는 자 앞의 어린양과 같이 끌려가신 것은 마음에 도망가고자 하는 마음을 참고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 육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에 본능,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생명의 본성이 예수님을 이끈 것이듯, 사람이 나를 보고 스스로 삶이 심판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하나님의 생명대로 살 뿐인데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게 생명의 법이다.


그러므로 아들에게 심판이 위임된 것은 아버지가 홀(권위를 상징하는 막대기)이나 반지를 아들에게 주어 권한을 위임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의가 아들로 나타나서 아들이고, 그 아들로 나타난 삶 그 자체가 아버지의 의와 다르게 살고 있는 아들이 아닌 모든 인생들에게 심판이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들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심은 모든 인생에게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삶 지으신 그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삶을 살던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것 자체로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심판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돌이키는 사람은 생명의 부활이 되고, 예수님의 삶을 보고도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조각하고 그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죽음의 부활과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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