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예수님을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사를 집례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은 제사를 집례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제사를 위하여 제물을 파는 사람들의 상을 엎고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사장인 것은 제사의 목적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제사와 제사장의 존재 이유는 사람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모든 제사와 제사장의 존재 이유의 본질이다.


전투에선 이기고 전쟁에서는 진다는 말이 있다. 전투의 목적은 전쟁을 이기는 것인데 산발적인 전투는 이겼는데 정작 전쟁을 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축구에서 공을 점유하는 점유율이 설사 90% 이상이었다고 해도 골을 적게 넣었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제사의 모든 규례를 지켜 수 없는 제사를 드렸다고 해도 제사의 목적인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되게 못한다면 소용없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나타났다는 것은 모든 제사가 소용없는 제사였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다. 제사장들과 이전의 제사가 온전하다면 멜기세덱이 왜 필요하겠는가?


이것은 사실 율법도 같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다. 예수님 이전에 율법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이나 제사 모두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왜 온전하지 못하다고 하는가?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매우 당황한다. 그 이유는 율법과 제사를 자기 밖에서 객관적인 명제로 정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온전한 분인데 그 분이 주신 율법과 제사가 온전하지 않을리 없다. 율법과 제사가 온전하지 않은 것은 사람이 온전하게 받지 않아서 그렇다. 즉 사람 심령 안에, 각 개인의 심령 안에 온전해지지 않아서 온전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제사를 주셨는데 주신 형식만 지키고 뜻은 버린 것이다. 전투는 이겼고, 점유율은 높은데 전쟁도 경기도 진 것과 같다.


율법이나 예수님이나 모두 한 개인이 자기 심령에 온전히 받기 전에는 어차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건 자기 세계가 아니다. 학교가 그렇게 많아도 모교는 하나 밖에 없는 것과 같다. 나와 상관 있는 나에게 그 학교의 세계가 있는 학교는 내가 다니고 졸업한 곳 뿐이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제사를 주셨는데 사람이 주신 의를 모르고 형식만 지키면 심청전을 읽고 효도하려면 바다에 뛰어 들어야 한다고 이해하나 것과 같다. 그건 심청전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의 비유(막 12장)를 하신 적이 있다. 율법과 제사 그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여 멜기세덱과 예수님이 오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 비유 속의 포도원 주인이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가.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의미를 잘 새기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속에 여전히 율법과 제사의 의미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하면 이 모든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냥 자신과 같은 생각이 성경에 있는 정도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시든, 제사를 정하든, 성경을 주시든, 아들을 보내든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다. 성경 곳곳에 하나님은 한 분이고 그 뜻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람을 만드실 때 뜻하신 것을 원하심이다.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삶이 되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고, 제사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셔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려 하니 너의 마음에 들어가게 너를 허락해 달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율법의 의는 모르고 그 형식만 지키고, 자신의 삶과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심은 순종하지 않고 제사만 드리니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을 보내셔서 율법과 제사를 주신 뜻이 사람 안에서 완성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율법의 완성이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 제사라고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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