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믿음에 덕을


성경에는 위의 말씀과 같이 단계적이거나 열거된 말씀들이 제법 있다. 이런 말씀을 대하면 순간적으로 사람들은 각각이 순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순서가 있는 것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계단과 같이 하나씩 성취해 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자람과 같은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를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는 것은 믿음이 있으면 덕을 세우고, 그리고 그 다음에 지식을 갖추고, 지식이 있는 자는 절제하려 힘쓰고, 그래서 참고 인내하라는 식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말씀 역시도 생명의 법으로 봐야 한다. 적어도 하나님을 생명의 주라고 여긴다면 생명의 주관자가 주시는 말씀이니 생명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덕을 세우게 될 것이며, 덕이 있다면 지식의 밝음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며, 안다면 당연히 절제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것은 인내로 나타나고, 그 인내는 우리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경건한 삶이 될 것이며, 그 경건은 결국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을 대함에 있어 단계별 숙제처럼, 또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 저 덕목들을 하나씩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가르치고 받고 있다면 단언컨대 생명의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생명의 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대하면 베드로 사도의 열거한 순서가 마치 아이가 나면 누워만 있다가 얼마가지 않아 뒤집을 것이며,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기어 다니다가 일어서게 되고 얼마가지 않아 말하고 걸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신성에 참예하는 사람들에게 저런 일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의 시작은 ‘이러므로’이고 그것은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면’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이 자기 안에 본성으로, 생명이 되었다면 그 생명은 베드로 사도가 열거한 삶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각각의 덕목은 생명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생명이란 시절을 좇아서 잎이 나고 열매를 맺듯이 자란다. 이것은 언뜻 순서를 가진 일이만 약속된 것이기도 하다. 덕이라는 것은 사실 영어에는 없는 말에 가까운데 NIV성경에서는 diligence라는 단어로 표시되어 있는데 있는 부지런함에 관한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빈도부사와 관련이 있다. ‘항상’, ‘쉬지 말고’와 같은 말씀들이 있는데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온전하다면 부지런하다고, 그리고 그 부지런함을 인하여 덕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없거나 약해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두고 본다면 살아가다 화가 나는 순간 ‘아 항상 기뻐하라고 했지!’라며 화를 참는다면 이미 ‘항상’이라는 조건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냥 그 삶 자체가 기쁜 것이고 삶이 감사한 사람이라면 사는 동안 항상 기쁜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때로 화를 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것에 화가 나는가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 예수님께서 화를 내셨던 것, 사도들이 경계하는 것들을 보고서 화를 낸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 살고 있으니 그런 것에 대하여 화가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를 가졌다는 것이 기쁨인 사람은 그 모든 순간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덕을 더한다는 것은 믿음이 있기에 언제나 그 믿음을 인한 성실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성실은 신념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의 성실함은 마치 우리가 사는 동안 의식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숨을 쉬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의 믿음은 그 믿음의 성실함이 그와 같이 쉬지 않고 성실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덕에 지식을

그리고 그 믿음과 덕이 있다면 스스로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과 말씀과 법에 대하여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공부’라는 말도 고착화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요 14:26) 


지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지식이라 여기시는 것이고,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보이신 모든 것이 그것이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성령이 임하시는 것 그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성경을 공부하고 싶다면, 아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알려고 한다면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 앞에서 멈추어야 한다. 신학이나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자신은 성령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신학이고 성경공부인 것이다. 공부한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고 모른다는 것은 성령이 없다는 것,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에 지식을 더한다는 것은 신사다우면서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알고 공부한 사람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덕이 있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 곧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본성이 되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본성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니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과 본성이 되도록 잉태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의 성품에 참예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이 오셔서 모든 것을 알게 하셨다는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본성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믿음이 있는 것이며, 이 믿음은 생명에 관한 것이니 생명이 그 숨을 쉬듯 성실하며 또한 숨 쉬듯 표현되는 생명의 본성이 덕스러운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한 단계씩 이루거나 더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면서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인 것이다.


그렇게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오직 생명이요,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그 생명은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존재의 정체성으로 순종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그 순종하고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서 생명이 되도록 하시는 성령이 임하셔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알게 하시니 그것이 바로 지식을 더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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