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신앙의 타락과 변질을 이야기하면서 결혼을 비유했다. 신앙의 타락을 기혼자의 불륜이라고 한다면 불륜이 결혼을 해야 해당되듯 신앙의 타락도 제대로 된 신앙을 가져보기라도 했을 때 해당된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로나 알고 육신이 바라는 대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 빌던 신앙의 세계가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그것은 타락조차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칙대로 공부하고 경쟁하여 이긴 자가 목사가 되어 만든 교회는 그 바라고 간구하는 바가 결국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가치관 위에 있다. 그것은 더 크고 위대하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를 더 크고 아름답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교회에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것이 자랑인 것도 그렇다. 하나님이란 절대자를 믿으니 모든 것이 다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특함 같지만 말구유라는 자리에 하늘에서 땅으로 오셔서 세상 최악의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런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데도 그러고 있다.


그런 가치관에서 예수를 믿다보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경쟁에서 차별화되는 것이고, 그 차별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종교적 규범의 엄격함과 경건함을 내세워 세상의 사람들이 다들 노력하지만 이루지 못하는 도덕적인 성과나 세상적인 모범을 예수 믿는 사람, 정확히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해 내었다는 것에 두고 있다가, 그 행위가 무너진 것을 우리가 과연 타락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들, 장로교나 감리교나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나 다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와 같아서 그들의 타락은 타락이라는 불륜이라고 할 수도 없고 단지 문란한 사생활과 같은 것일 뿐인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믿어본 적도 없는데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타락한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타락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떠나 논리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적어도 타락이라고 문제시하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믿어 보기라도 해야 한다. 존재의 하나님께 가서 자기 행위를 드리고 눈에 보이는 형식과 세상의 외식에 대한 평안과 성공을 얻으려하고 그것을 얻는 것이 하나님께 복 받은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라 여긴다는 것이 가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래지 신앙 생황이 아니다. 하나님께 성경을 종교적 규범으로 지켜내는 공로를 드릴 테니 반대급부로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 그리고 사후에 천국까지 보장해 달라는 일방적 거래 요구사항에 불과한 것이다.


불륜이란 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것도 어떤 자격을 갖춘 자가 저지를 수 있는 일이듯 신앙이 타락하려면 어쨌든 제대로 된 신앙을 한 번이라도 가져봤을 때의 이야기지, 존재의 하나님을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으로 섬기고 그 드림의 대가로 영생복락과 부귀영화를 청구한 신앙 세계에서 요구된 종교적 규범과 엄격한 도덕, 사회적 규범을 어긴 것은 타락을 할 수 있는 자격도 아니라는 것이다. 



타락을 이렇게 ‘타락’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를 기준으로 보면 이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타락과 변질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앞서 이야기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의 신앙인들보다 더 엄격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온전하게 지켰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들을 보고서 늘 타락했다고, 죄에 빠졌다고, 또 음란하다고 책망하시고 벌주시기를 일상으로 삼으셨다.


불륜이라는 것은 자기 짝이 아닌 것과 상관한 것을 말한다. 타락도 그렇다.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벗어난 것에 의미와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본다고 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에서 바로 믿지 못하는 자리로 변질된 것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믿는 자리에 이르지 못한 그 모든 것을 죄악으로 규정하시고 방탕하고 간음한 여인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으로 섬기는 것이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종교적, 사회적으로 엄격하고 경건한 규율을 지키며 남을 위한 희생을 하는 것으로 아는 것과 같은 것은 사람이 보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런 삶의 모습은 모두 타락이고 음란이라는 것이다. 종교적 규범을 지켜서 본을 보이고, 선한 공로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에 합당한 존재가 먼저 되었는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났기에 그렇게 사는 것 외에 없어서 그러는 것인지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유일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에 그 육신이 어떤 성과를 내기를 기대하셔서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것을 기대했는데 육신을 이렇게 약하게 만드셨다면 하나님은 옹졸하거나 무능하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람이 가진 이 육신은 세상의 생명 존재들 중에서 힘과 능력에 관해서 무능한 편이다. 그럼에도 모든 동식물 최상위에 있는 것은 힘과 능력으로가 아니라 지혜, 특히 자아 인식을 바탕으로 한 존재에 대한 고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란 존재는 DO로 승부를 하여 이기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실존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해 하나님의 힘을 빌리려 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대하시는 분도 아니고, 사람을 그렇게 만드신 분도 아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정체성이 그것을 기뻐하시거나 의미를 두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다른 신을 믿듯 하나님을 믿는다. 존재의 신께 가서 DO를 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음란하다고, 타락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하나님을 존재로서 만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하려고, 무엇을 드리려고 하는 모든 것과, 그 반대급부로 영생과 구원과 평안과 성공을 바라는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근원적 타락이고 사망이며 죄의 상태다. 제 아무리 하나님께 경건하게 나아간다고 해도 그 목적이 여기에 있고, 가치관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그런 상태면 제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소용이 없다. 이것은 비유컨대 간첩이 온갖 선행과 봉사를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집에서 키우는 개가 사람의 말을 한다면, 더 나아가서 자기 존재 자아에 대한 철학적 묵상을 한다면 그것은 잠시 신기할지는 몰라도 아주 무서운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사람도 마찬 가지다.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만들었는데, 그래서 사람이 보기에 연약하게 보이지만 사랑의 하나님이 가진 사랑이라는 성품을 표현하기에 연약함이 너무 적합해서 그렇게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더 강해지고 높이 올라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여기며 노력하고 있으니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잘못된 것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망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다. 죄는 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남을 위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이나, 세상에서 지탄 받는 타락한 모습을 보이거나, 영적인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에 놀랄만한 일들을 밥 먹듯 해 낸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타락 이전에 사망의 상태고, 목적을 상실한 무용지물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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