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1-7) 관용을 베푸는 존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빌립보서 Date : 2017. 9. 1. 13:45 Writer : 김홍덕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관용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관용을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어떤 순간에 이 말씀이 생각이 나서 관용할 마음이 없는데 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참는다면 그것을 관용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사도는 관용을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알게 한다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라는 것이지, 관용이 없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갑자기 관용을 베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관용을 베풀고 나면 반드시 반대급부를 기대합니다. 성경대로 했으니 복을 바란다거나, 자기 기대대로 되지 않으면 후회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 반대급부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래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행위 자체가 논점이 아닙니다.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냐의 문제입니다. 기뻐하라고 하면 기쁘지 않은 순간을 만나면 기뻐하려고 노력해서 이루라는 의미가 아니라 기뻐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존재라는 항상 그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논점을 벗어난 아니 반대편에서 보면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 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나 관용을 알게 하라는 것과 같은 절묘한 표현들은 바로 존재론적 관점에서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용을 알게 한다는 것은 관용이 내재된 존재이기에 가진 관용을 보이라는 것이지, 관용이 없는 상태에서 성경의 말씀이 생각나서 관용을 베풀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항상 기뻐하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존재,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기쁜 존재라면 존재하는 동안 항상 기뻐하는 것이지만, ‘인생은 고(苦)’라는 기본 인식으로 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자, 그리고 ‘항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늘 기뻐하자 혹은 기뻐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관용을 알게 하라고 하면서 주께서 가깝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께서 가깝다는 것을 영어에서는 The Load is at hand.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안에 있는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여줄 관용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관용은 주님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보이는 것을 두고 “너의 관용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이야말로 진정한 관용인데, 그 이유는 십자가의 도가 관용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다른 것이 아니라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엉터리 주장과 선악과를 먹은 마음으로 규정한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셔서 지시게 된 십자가를 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관용의 절대적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는데, 세상이 그것은 거짓된 것이라고 오히려 그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것을 수용하는 것 이상의 관용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이상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관용을 보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그것이 또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순종한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 같은 정체성, 같은 관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라는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그리스도의 본성은 낭중지추와 같아서 숨길 수 없습니다. 일부러 보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사람들이 빛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는 것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은 나타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알지 못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의 삶이 자기 선악의 기준과 행위로 성경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관용은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보이는 자가 보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 그것에서 관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본성이 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울사도는 그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이 관용을 보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용을 가지고 보이려면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삶의 본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다 시늉이고 행세일 뿐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그 존재 자체로서 기쁜지만 보면 됩니다. 인생은 고생이라고 생각하기에 교회에 다니고, 그래도 죽어서는 편안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예수 믿고 있다면 이미 항상 기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고 관용을 보일 수 있는 사람, 그리스도가 그 손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나 관용을 베풀라는 것은 그들을 향한 말씀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자신의 말씀이 되려면 기쁘지 않은데 기뻐하려 노력하거나, 억지로 참으며 관용을 베풀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 그것이 자기 삶의 본질이 되기를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사도의 권면인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Philippians 4: 1-7) Be moderation


Let your moderation be known unto all men. The Lord is at hand.(Philippians 4: 5)


Let everybody know tolerance. At some moment when I think I should be tolerant, I can not tolerate this word, but if I persevere because I have to keep this word, can I say tolerance? It's not like that.


The apostle Paul asked to know tolerance. Knowing is a story when you already have it. It is not to be tolerant and suddenly generous when you think you need it. After giving up tolerance, I always expect to receive the opposite benefit. If you do not want to be blessed because you have followed the Bible, or if you do not expect it, regret is the opposite. This does not mean that you are buying a deal.


Every word of the Bible is not an act itself. It is a matter of being able to do such an act. If you tell them to be happy, you will not be happy to try to rejoice if you meet a moment of unhappiness. Being a joyful being is always there, so you can always be happy. Apart from these Biblical arguments, the opposite is to keep the Bible as an act.


The exquisite expressions such as always being pleased or letting you know tolerance are words from the ontological point of view. To know tolerance is to show tolerance because tolerance is an inherent being, not to tolerate the Word of the Bible in the absence of tolerance. It is also said that you should always be rejoicing like that. If you are a joyful being, you are always happy while you are there, but you live with the basic perception that life is bitter, and yet you are pleased with it. It does not mean to rejoice or to rejoice.


It is in the same context that the Apostle Paul said to let us know tolerance and that the Lord is near. It is said that the Lord is near, in English, The Load is at hand. The Lord is in us. It is to see what is inside. That is the tolerance we will show. In other words, that tolerance is the identity of the Lord. Therefore, it is to say, "Show your tolerance" about the person who has the identity of Jesus Christ showing Jesus' identity.


Jesus' identity is genuine tolerance, because the intent of the cross is tolerant. It is because the righteousness of the cross is not different, but Jesus is the sinner and the crucified sinner. The righteous are sinners for sinners. That is the absolute form of tolerance.


The Son of God came to the world made by God and preached the will of God, but the world is trying to kill his son rather that it is false, and there is no more tolerance than accepting it. There can be no more in this world. The person who obeys Jesus' crucifixion and shows that it is also his own image is a person with the same mind, the same identity, and the same tolerance as Jesus. It is to show that it is such a being.


But if you know it, the nature of Christ is like a nail polish and can not be concealed. You do not have to try to show up intentionally. Jesus said that it would be like people putting light on a hill without putting it under a horse. A person with the same identity as Jesus can not be concealed. It is not because it is not visible but because people's eyes are dark. Just as Jesus came into the world by light, but the people did not know, the life of a person with the nature of Christ is invisible to those who want to keep the Bible in terms of his standards of good and evil.


Tolerance comes from here. It is tolerance in what it does to labor for those who can not see. It is that the righteous become sinners for sinners. It is the image of a man who lives on the cross as the life of Christ, whose righteousness and will is God's own nature. The Apostle Paul says that it is. So, the person who does not have the nature of Christ in himself and does not always rejoice, but who is trying to rejoice, can not show this tolerance.


Therefore, to be able to have this tolerance, you must first become such a person. The identity of Christ must be the essence of his life. Without it, it is a poetry, a pretext, and not a word. Nothing else. I can only see if my being is glad as its being. If you believe in Jesus because you think that life is a hardship and you want to be comfortable in death, you are not always happy.


A man who is always joyful and tolerant, who has Christ in his hands is not someone else but a person with Christ's nature in him. To always be glad or tolerate is to speak to them. Therefore, it is not a joy to be his word, but that he should try to rejoice, to forbear and to tolerate, but first to seek the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to become the essence of his life. That is the exhortation of the Apostle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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