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알려면(1)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6. 9. 10:29 Writer : 김홍덕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아가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먼저는 ‘이것이 성경을 보는 진정한 관점’이라는 수많은 외침들 중에서 어떤 하나를 분별하여 길을 나서야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따라나선 그 길이 진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알고자하는 마음도 있고, 알려주겠다는 외침도 많은데도 망설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과 성경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결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쉬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불확실성은 사람으로 인한 것?


사람들은 확신할 수 있는 것을 따라나서려 합니다. 하나님이라면 분명히 사람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을 보이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하신 말씀과 계시를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도 그대로 보느냐는 것입니다. 


같은 하나도 각자의 안목과 생각대로 보는 것이 사람이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자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의도대로 보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정리되어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사람이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는지를 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성경은 분명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선악과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대하여 가지신 뜻과 아담(사람)이 가진 생각이 달라서 죄의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사람이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신 반면, 같은 나무를 보고 아담과 하와는 보암직도 먹음직도 한 것으로 본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온전하다는 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흐릿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은 어쩌면 기본적인 가정일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말씀하셨지만 사람이 각자 생각과 기준이 다르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혼돈스러워진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 없이 많은 외침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견해’라는 많은 외침들 중에서 올바른 안목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아직도 세상이 망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테니 누군가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바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을 보고 이 불확실한 여정을 떠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문제인 무엇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본질인지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불확실한 여정을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 불확실한 여정을 떠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홍수와 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노아의 홍수도 이와 같았습니다. 물 곧 말씀이 넘쳐났지만 그 물로 인하여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쳐져서 넘쳐나는 물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법이 어우러진 ‘이것이 올바른 성경 해석’이라는 수많은 외침들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을 선택할지 망설이다 세월 다 보내서 죽어가고, 또 가 봤더니 생명이 아니어서 죽어갑니다.


이런 혼돈을 이기려면 “빛”이 있어야 합니다. 빛이 비춰야 무엇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빛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두고 요한 사도는 “빛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빛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온전한 것인지를 구분하고 인식하게 하는 기준이시기 때문에 빛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비추어서 바르고 같은 것이면 옳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진 특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것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이나 우리나 다 십자가에 매달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기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성경을 아는 것이라는 수많은 외침들 중에서 무엇이 온전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인생이기만 하면 되는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연약하고 부정하게 보이는 이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인지를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면 외치는 외침들 중에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나도 그 기적 같은 현상은 만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그건 적어도 오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런 기적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여 나도 그런 기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면 한 번 도전해 봐도 좋습니다. 그러면 기적을 만나던지 아니면 최소한 자신은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외칩니다. 국내도 모자라서 미국이나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풀어주는 성경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하나님을 그들과 같이 발견하려면 그 정도 공부는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그 또한 우리가 따라 나설 길은 아닌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따라나설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냥 배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한 것 보다 더한 것도 할 것’이라고 하셨고,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 배워서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 길도 옳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 또한 얼마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가르치는 내용도 같은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새벽기도회까지 모든 예배와 모임에 열심이어야 온전히 알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곳에 가려면 자신의 생활패턴이나 마음이 그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역시 가 봤자 한계만 느낄 것입니다. 


헌금해야 복을 받는다고 하는 곳이 있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형편이라면 헌금은 그림의 떡입니다. 그런 곳도 역시 내가 따라갈 수 있느냐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오늘> <나에게> 적합한 곳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가르침이나 해석이 아무리 난무해도 구분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나 자신이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과 같이 될 수 있느냐는 것과 그 가르치는 것을 해 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 길을 나서야 합니다. 그런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과 같이 되기도 어렵고, 가르치는 내용대로 살 수도 없다면 갈 이유가 없습니다. 괜스레 인생을 드려서 시험에 들 뿐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도 구분을 할 수 없지는 않습니다. 그 상식으로 성경에 대한 해석의 소리를 듣고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도 저거라면 할 수 있다!’고 느끼거나 아니거나 정도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만드신 이가 그 피조물의 능력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해 내어야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도록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믿어야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역시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을 우리가 할 수 없다면 그것도 믿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정해야 성경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성경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따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을 따라 할 수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것 중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눈에 보이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한 본질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하는 첫 번째 관문, 수많은 성경에 대한 해석과 접근법과 외침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 육신을 가진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육신으로 또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나의 삶의 역량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라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호리라도 남김  없이 다 갚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갚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목적의 빚을 다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다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알고자 하는 사람, 그래서 성경을 이해하고 묵상하고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외침, 어떤 해석을 따라 가야할 것인지 불확실성 앞에 놓여 있다면 그 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이 육신과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내 삶의 형편으로 따라 가서 나도 그 이상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그 질문의 답이 가리키는 곳, 그곳이 바로 따라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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