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장' + 4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육체로 행하는 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인생과 삶의 목적과 의미로 믿는 믿음으로 된다. 그런데 성경에는 생각보다 행하라는 명령이 많다. 이것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살았다는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행함은 생명이 가진 본성이 이끄는 행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전하는 갈라디아서 속에 있는 바울 사도의 선을 행하되라는 말씀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물론 여기서는 이 무엇인지도 중요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도덕적인 선함, 행위의 선함이 아님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선은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다. 따라서 선을 행하려면 당연히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별개는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사람에게 칭송받는 것을 안다면 그럴 수 없다. 사람이 생각하는 사회 도덕적인 선함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하나님의 선한 본성 중의 일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비롯되었을 때만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선을 행함에 있어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어떤 일을 행하고 낙심하지 않으려면 결과를 자신이 주관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결과까지 자신의 의도한 대로 되기를 바라고 관철하려 하면 결과에 따라서 낙심한다. 그런 낙심하는 마음이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하지만 결과를 하나님께 맡긴다면 그 어떤 경우에도 낙심할 리 없다. 당연히 피곤하지 않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흔히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속내는 하나님께서 내가 기대하는 대로 하실 것이라는 아전인수적인 기대다. 하지만 이것은 말이 기대지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에 대한 협박에 가깝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그런 기만에 당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 하나님의 행사로 인하여 사람이 자기 생각과 다른 결과를 받으면 피곤해진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든, 어떤 행동을 하든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하신다. 그래서 순종이 중요하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보면 이는 더 확연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본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맏아들이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간절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이 드러난 것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하나님의 선을 행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긴다. 이는 순종의 본성이 이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의 본질이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하나님의 선을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는다. 자기 존재의 시작에서부터 거듭난 생명으로 사는 것까지 어느 하나 하나님의 의와 뜻 아닌 게 없음을 아는 사람이 결과를 자기 뜻대로 기획하고 관철하려 할 리 없기 때문이다.

 

선은 사회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다. 행하라는 말씀이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노력을 원하심도 아니다. 선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고 행함은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삶의 모양이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로 났기에 사는 삶도 하나님의 뜻대로, 삶의 결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에 순종하니 낙심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니 또한 피곤치 않다. 이 모든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난 사람의 삶의 모습이다.

 

 

 

(갈 6:6-10)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9. 14. 09:41 Writer : 김홍덕

반면에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오히려 육신을 내어주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육신 가진 인생을 받은 이유는 육신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신이 찔리시니 흙으로 만든 옥합이 깨어지니 향기가 넘쳐난 것처럼 물과 피가 나왔다고 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육신이 깨어지면, 그러니까 종과 같이 섬기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면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려면 육신이 성령에게 드려져야 한다. 이것이 헌신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의와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이신 말씀이 심령에 믿음으로 심긴 사람을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다. 이게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씀은 근본적 의미다. 이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는 것이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깨닫게 도우시며 예수님을 증거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로 연결된 하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위해 심는 것은 자신보다 앞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육신의 큰 수고로 자신과 같이 어두운 사람을 위하여 수고한 사람을 보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다. 이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은 성령을 인함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육신의 수고를 한 사람과 같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육신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시도록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자신을 가르친 사람에게 좋은 모든 것으로 함께하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 11:3)

 

이러한 법을 알면 성령을 위해 심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당연함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도록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고, 또 이 거듭난 생명의 본성, 곧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아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이 거듭나도록 육신으로 수고한 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형제같이 자신도 수고하는 육신으로 헌신하며 사는데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이것은 신학으로 공부할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남에서 시작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라는 자기 짐을 지고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의 열매가 바로 성령의 열매다.

 

(갈 6:6-10)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9. 12. 04:00 Writer : 김홍덕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사람은 썩은 것은 거둔다는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은 육체는 나중에 썩으므로 육체를 위하면 썩을 걸 거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제다. 거두는 것이야 나중 일이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 곧 거두는 때에 육체가 썩을 것이니 지금 육체를 위한 것이 의미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나중에 얻기는 얻는데 이미 썩은 것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육체를 위하는 것은 위하는 그 자체로 이미 아무 값어치가 없다는 말씀이다.

 

반면에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는다고 하신다. 그리고 영생은 유일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다. 수명이 유한한 육신에 거하면서 수명의 한계를 허무는 것을 영원으로 생각하는 개념에서 세워진 영혼의 영원한 존속이 영원함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원함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실 것이라 말씀하신 뜻도 여기에 근간이 있다.

 

그렇다면 육신을 위해 심는 것은 어떤 것인지, 또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미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육신을 위하여 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쉬지 않고 설명해 왔다. 그것은 바로 육신의 평안과 육신이 세상을 살 동안 세상의 가치로 성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의 수혜자는 바로 썩을 육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육신이 평안해지고 세상에서 삶이 성공적이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크게 착각한다. 그건 착각을 넘어 자기 합리화다. 바울 사도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된 줄로 아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하심도 이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속여봤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만에 당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해 두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사람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이유는 육체의 어떠함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보시는지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어떠함이 세상의 기준이라데 있다. 세상의 기준으로 잘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도들은 모두 불의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는 육신이 잘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영광스럽고 본받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가치는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임을 잊으면 안 된다.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을 가치로 여기는 이들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은 반대다.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듣고, 그 들은 바를 인하여 소망하고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과 육체의 평안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떼로 몰려가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우겨도 하나님은 그것을 신앙이나 믿음이나 의로 여기시지 않는다. 그들에게 하실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가 도무지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씀뿐일 것이다.

 

(갈 6:1-5) 짐을 서로 지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9. 11. 12:02 Writer : 김홍덕

앞서 바울 사도의 서신 속에 너희저희가 있는 것을 설명했다. 성령의 열매를 설명한 다음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 것이라고 말씀한 뒤 성령으로 사는 삶을 포괄적으로 이어간다. ‘형제들에게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설명하는 말씀이 그것이다. 형제들은 너희, 사람은 이전에 설명한 저희로 볼 수 있다.

 

사람들과 기독교인 대부분조차 인정하지 않겠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범죄는 도둑질과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벗어나서 사는 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이므로 그 상태에서 도둑질이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은 실질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 도둑질과 같이 사람들이 공통으로 죄로 여기는 것은 죄인들의 삶 속에 있는 죄가 심화하거나 드러난 것일 뿐이다.

 

바울 사도가 사람이 범한 죄가 드러났을 때라고 하신 말씀 속의 죄 역시 그렇다. 이 말씀을 풀어보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이 드러났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대하라는 말씀이다. 주목할 것은 죄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사실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이기에 달리 드러날 것도 없는데 드러나거든이라고 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를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성령으로 행하는 삶을 산다면 그 삶을 본 사람은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처럼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고백하게 된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죄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때 성령으로 사는 형제들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를 바로 잡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로 잡는다는 것은 어긋난 것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로 사람이 벗어난 존재의 정체성에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회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 다소 생소한 관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렇게 서로 짐을 지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씀으로 설명한 의미가 확정된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육신과 수고를 종과 같이 내어주는 법이고, 또 그 모습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이자 자신 역시 그렇게 사는 게 자기 존재의 목적임을 깨닫는 자를 회복시키는 법이기에 이 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종과 같이 짐을 지는 것이고, 서로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면 서로가 육신의 수고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살기에 서로 짐을 지는 삶을 산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또 하나 우리는 이 에서 사람의 죄가 드러나는 것은 죄를 시인함이고, 이 죄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짐은 형제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한 아버지의 본성을 가진 형제들이 지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남을 위한 수고가 아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곧 하나님이 주시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또 그것을 인함이 아니라면 아무짝에도 쓸데없다. 이 짐 역시 그렇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형제들에게만 있는 짐이다. 이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짐이다.

 

이 짐은 두말할 것 없이 십자가, 곧 자기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이 짐은 쉽고 가벼우니 지고 따라오라 하신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라는 짐을 지시니 그리스도의 법이 온 세상에 드러나고 성취되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보고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인생인 자신에게 보이신 존재의 목적임을 깨달을 때 그릇된 자리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므로 죄가 드러남과 동시에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형제가 된 사람은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렇게 산다. 그것이 성령으로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그 자체가 를 위하는 본성이다. 그릇된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목적을 깨닫도록 자기 육신의 수고와 또 육신을 종과 같이 내어주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이자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짐을 지는 것이다. 이 짐을 서로 지려면 서로가 모두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자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본성대로 사는 것이고, 또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도 없다고 했고,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자 그 본성이 이끄는 삶을 자기가 보므로 자기에게만 자랑할 뿐이다. 이 말씀은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야기이므로 너무 당연하지만,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진 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 행위로 공로를 쌓아 의롭게 되는 것은 그 자체가 남을 통해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 성령으로 살고 행하는 사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이같이 자기 안에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으므로 그 삶이 짐을 지는 삶이다. 결론적으로 언제나 자기 짐을 지라고 하신 것은 괜한 수고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면 누가 뭐라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한 존재의 자리를 떠난 그릇됨에서 회복되도록 예수님과 같이 자기 짐을 지고, 그런 형제들이 모여 서로가 되면 서로가 짐을 지는 관계가 되며, 그 짐은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기에 자기 짐을 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