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2:11-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5. 23. 11:52 Writer : 김홍덕

바울의 광야 생활은 그에게 세례였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제자들의 상당수가 원래 세례요한의 제자였기에 그들 대부분도 세례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고 무엇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셨다. 하지만 바울에게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가 세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형식에 있지 않다. 물에 들어갔다 와야 한다는 주장을 기준으로 침례교 장로교 등으로 갈라지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세례의 핵심은 고백이다. 어떤 세계, 어떤 가치관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세례의 핵심이다. 그리고 살 수 없는 가치관의 뿌리가 바로 율법이다.

 

이 율법에 대하여 앞선 장에서 율법은 구속력이라고 설명했다. 뭔가를 해야만 결과가 달라진다는 생각을 인하여 그 뭔가를 행하는 생각이 바로 율법이다. 기도를 하고 운전이나 일을 해야 하나님께서 잘 보살펴 준다고 한다면 기도하는 것 자체가 바로 율법이다. 세례는 바로 그런 가치관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다. 율법 아래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광야에서 살았던 세월을 이야기 한 다음에 율법에 대하여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것이 진정한 세례고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자기 안에 생명과 본성이 되었다는 고백이다. 율법에 관하여 연갑자들 보다 더 열심이었던 바울 사도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 진정한 세례이고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복음의 본질이 자기 생명이 된 증거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 2:19)

 

그리고 바울 사도는 자신이 율법에 대하여 죽는 죽음이 그리스도와 함께였다고 설명한다.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말씀을 준행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율법에 대하여 죽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죽음이 헛된 것이라고 선언한다. 자신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했고 모든 선교의 핵심 중의 핵심이 이것이므로 자신이 율법을 다시 세운다면 자신 역시 범법자가 된다고 말한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8)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순순히 끌려가신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만의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절대적인 선함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세상의 악함에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이 자기 안에 있게 된 사람이어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신을 악한 것 앞에 내어주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람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을 교훈하려 한다. 세상의 악함을 성경과 신앙으로 바로 잡으려고 한다. 그렇게 세상을 바로 잡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피라미드 꼭대기로 보내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가장 낮은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 세상의 악함이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에 자신을 내어 주셨다. 그렇게 했더니 드러난 것이 물과 피, 곧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삶이 된 것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본질과 반대로 신앙으로 세상을 능동적으로 이기려고 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신앙의 능동성은 무엇으로 의로워질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 행함이라는 능동성으로 의로워지려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연갑자보다 율법에 더 열심인 이유로 그리스도를 핍박했다는 것에서 진정한 능동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은 지극히 수동적인 것이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 역시 전혀 능동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을 신앙으로 바꾸려고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훈계하려 드는 이들은 그리스도로 죽은 사람도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아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주장 앞에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라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된다.

 

믿음은 그 어이없는 예수님의 모습과 삶이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이 내 삶의 목적이라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이 가진 하나님 아들에 대한 기준 앞에 죄인이 되는 어이없는 상황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또한 자신의 운명이요 본성이 되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본성의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지극히 능동적인 자신의 과거를 소환하고 그것을 떠난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라고 고백한다. 율법 아래 살 수 없고, 능동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의 의를 사람에게 관철시키는 것을 의로 여기는 가치관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이고 세례다. 그런 자신을 고백하면서 율법과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전하는 말씀의 증거를 삼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고찰과 묵상 없이 함부로 뇌까릴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을 의롭게 여기는 것 앞에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본성이 내 존재와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자 증거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본성이 같은 생명이란 의미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이유다.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삶이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에 합당한 존재이기 때문에 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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