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계명은 이웃에게 반대하는 증언하지 말라는 뜻의 '네 이웃에게 거짓으로 증언(증거)하지 말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다른 이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사는 기회를 훼방하는 거짓을 전하지 말라는 게 이 계명의 의도다.

 

우리는 여섯 번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살인하면 안 되는 이유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기회를 박탈하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걸 이야기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림자도 없는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형상이 필요해서다. 그 형상, 그 육신이 바로 사람이고, 성경은 이 사람에게 그 뜻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오직 사람이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바라시는 변함은 없는 뜻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십계명과 성경은 모두 이 하나님의 뜻 위에서 듣고, 이해하고, 전해야 한다. 이 뜻과 다르게 성경과 말씀을 듣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건 불순종과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이와 다른 뜻으로 전하는 건 거짓 증언이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십계명 역시 이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의 목적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걸 훼방하는 거짓을 전하지 말라는 데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 아홉 번째 계명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 어린 소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과 연결된다. 거짓 선지자, 거짓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예수님께서 항상 있을 것이라 하신 가난의 문제처럼 세상에서 겪는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면 들어 주실 것이라고 전하고 외치는 게 바로 이웃에게 하는 거짓 증거고, 성령 훼방이며, 어린 소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르게 하나님을 전하는 게 이웃을 향한 거짓 증거

 

하나님은 존재의 신, 우리에게 너와 관계를 원하신다. 애굽의 종살이가 집과 같았던(안식이었던) 삶에서 구원받았다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와 정체성을 생각하는 사람이니 이웃에게 나에게 임했던 구원,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종살이하던 삶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대로 사는 삶을 살게 된 이야기를 전하는 게 바른 증거고, 참인 증거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전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어도 거짓 증거다. 자기들도 온전하지 않지만, 정통 교단이라는 사람들이 이단들의 선함을 비난하는 걸 상기하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전하려면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전해야 한다. 그래야 아홉 번째 계명을 지킬 수 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최우선 의와 뜻을 기억해야 한다. 그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할 존재며, 이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할 도구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이 육신의 필요와 소망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일갈하신 것이다. 도구를 위해 사는 사람이 없듯 하나님도 그렇다. 육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식이자 도구다. 목적이 중요하지 육신이 겪는 문제가 본질인 게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마치 알라딘의 램프 속 요정인 지니처럼 생각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거짓 증거다. 그런 거짓은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 기회를 어둡게 한다.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살인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뛰어 드는 게 나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종살이에 안주하는 삶에서 건지셨다는 걸 믿는다면 자기를 구원한 하나님을 바로 전해야 한다. 하나님을 세상에서 나를 종으로 삼았던 세상 가치를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믿거나 전하면 안 된다. 그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하나님이 보실 때 <>도 아니다. 그냥 죄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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