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하나님이 모세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을 듣고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에게로 왔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아말렉을 이긴 일이다. 그리고 장인은 딸을 낳은 사람이다. 또한 성경에서 여자는 형식을 의미한다.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이게 육신으로 남자 여자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그가 우리의 내용, 목적, 의와 의미이기 때문이다.

 

장인은 딸을 낳은 자
– 성경에서 여자는 형식
– 장인은 형식을 정하고 지키는 신앙을 비유

 

성경에서 여자는 형식을 의미하고 육신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남자는 내용, 여자는 형식이라는 성경의 설명 방식에 따른 표현이다. 또 예수님은 신랑, 우리는 그의 신부라는 표현도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라는 사람의 본질이자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육신이 옥합처럼 깨어지니 그 속에 있던 말씀과 생명이 우리가 알게 되고, 우리는 그 말씀과 생명이 내 삶의 목적과 의미인 걸 깨닫게 된다. 즉 예수님은 나의 내용이 되고, 성경이 여자로 표현하는 내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은 그 내용을 표현하는 존재, 곧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된다.

 

이처럼 성경에서 '남과 여'는 단순히 육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우리 삶의 내용과 본질임을 설명하는 이야기다. 그런 관점에서 장인, 장모, 아내, , 여자를 조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은 상태의 삶은 육신이란 형식만 있고 내용은 없는, 그러니까 존재 목적이 없는 죽은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앞에 신부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장가든다는 건, 그의 말씀이 우리 육신에 들어와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리스도라는 새로 거듭난 생명을 낳는다는 의미다. 그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이다.

 

이제 다시 모세와 장인 이드로의 이야기의 이야기를 이어가자. 모세의 장인은 모세에게 와서 형식을 제안한다. 모세를 찾아와서 모세가 백성을 통치하는 아주 유용한 제도, 그러니까 형식을 제공한다. 바로 십부장, 백부장과 같은 제도를 제안한 것이다. 형식을 낳은 장인이라는 그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보니 하나님의 종인 모세가 하루 종일 백성들의 민원을 듣고 해결하는데 시간을 쓰고 있었다. 이에 이드로는 모세에게 그런 방법이 좋지 않음을 설명하고, 백성 중에 재덕이 겸비한 현명한 사람들을 단계적으로 두어 사소한 일들은 그들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모세는 장인의 제안대로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두어 작은 재판은 그들에게 위임했다. 백부장은 백 명의 수장이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이 일을 마친 후에 돌아간다. 그는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와 모세의 두 아들을 모세에게 데려와서 이스라엘 사회에 제도를 제안하고 떠났다. 모세의 형식인 아내를 데려온 것처럼 모세에게 새로운 형식을 제안한 셈이다.

 

성경에는 이와 동일한 사건이 있는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일곱 집사를 세운 일이다. 사도들이 복음 전하는 일과 성도들의 구제하는 일까지 함께 하니 복음 전하는 일의 효율이 낮아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 교회 안에 여러 행정적인 일은 집사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복음 전하는 데 전념하게 한 일이다. (6)

 

십부장, 백부장, 집사와 같은 직분은 신앙 세계의 형식이다. 세례와 기도, 예배 역시 그렇다. 성경을 읽는 일도 그렇다. 육신으로 표현할 수 있는 행위나, 제도 그리고 사람에게 부여되는 직분은 모두 형식의 영역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이런 형식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형식은 내용의 표현이므로 내용이 본질이다.

 

형식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내용이다.

 

그렇다고 형식을 외면할 수는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은 형식으로, 행동으로 나타날 게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형식이다. 그런 사람이 행함으로 표현할 내용이 없다는 건 죽은 것과 다름 없다. 이게 바로 죄와 사망으로 죽은 사람의 모습이다. 만약 하나님의 내용이 함께하는 모세라는 사람 없이 십부장, 백부장을 세웠다면 그건 그냥 죽은 자들의 제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은 사람이 집사, 장로라는 형식을 입는 것도 아무런 의미 없다. 그런 사람을 집사, 장로 심지어 목사로 세우는 교회 역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모세의 장인이 제안한 형식과 제도가 의미가 있는 이유는, 모세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하는 사람이 나타낼 형식이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은 많은 종교적 형식 속에 있다. 주일 성수, 기도, 찬양, 봉사 등등 한 번에 다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의 신앙적 형식이 있다. 그 행위 자체가 잘못되거나 나쁜 건 아니다. 그 모든 건 분명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본질적 의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이 그렇다는 말씀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가 없는데 지키고, 세우고, 행하는 형식이나 종교적 규레는 아무 소용 없다. 그런 행위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누가 성전 문을 좀 닫아 주면 좋겠다고 한탄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예배와 기도, 집사와 장로 이전에 먼저 그런 형식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게 우선이다. 낮아지고, 세상 가치로 볼 때 죄인이고 실패자요 사형수가 된 예수님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나는 게 먼저다. 그렇게 거듭나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더니, 장인이 와서 형식을 세운 것처럼 형식은 자동으로 형성된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아무런 의문 없이 지키고만 있는 많은 신앙적 형식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볼 때다. 율법 신앙의 모습을 조명하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보면서, 또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니 형식을 낳는 사람이 와서 그 형식을 돕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먼저 그 나라와 그 의가 먼저임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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