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시작하자 물이 없다고, 먹을 게 없다고 불평했다.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본 게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불만을 토로하겠는가 싶겠지만 물과 음식은 생존의 문제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단순한 불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육신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육신의 삶을 보는 신앙적 관점의 대명사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모두 육신의 먹고 마심에 관한 것이었다. 심지어 처음 가나안 땅을 마주했을 때도 네피림 같은 가나안 백성의 위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한달도 걸리지 않는 광야를 40년 헤매게 되었다. 이 모든 건 자기 육신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를 핵심으로 보는 가치관에 매몰된 탓이다.

 

문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는 오늘 우리의 자세다. 그들은 우리 구원의 여정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육신이 먹고 마시는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아주 먼 옛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원망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존재로 거듭나기까지 과정에서 육신의 먹고 마시는 문제에 매몰된 우리 모습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라면 먹고 마시는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구원의 여정에서 육신의 먹고 마시는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견해는 '사람이 염려할 게 아니다'. 이건 하나님이 모든 걸 주관하시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공급하실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시는 이유는 사람을 향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한 분명한 목적이 있기에 사람이 그 목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이 먹고 마시는 문제는 육신의 생존 문제거나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가지신 유일한 창조주로 인정하고 믿느냐의 문제다. 먹을 것, 마실 게 없는 상태를 하나님을 원망할 일로 본다는 건 하나님이 그 일의 책임자라는 생각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당신은 나의 먹을 것 입을 것을 공급해야 하는데 왜 안 해?'라는 의미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회칠해도 인생의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이것이다.

 

궁극적인 사람의 모습이자 하나님이 목적하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떡이 아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자기의 양식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양식은 육신이 된 말씀대로 사는 것이란 뜻이다. 입으로 무언가를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내어 놓느냐의 문제라는 의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구원의 여정이고, 그건 예수님처럼 그리스도가 되는 과정(생명이 바뀌는 거듭남의 과정)이다. 그러니까 먹고 마신다는 게 육신의 떡과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존재가 되는 게 구원이고, 거기에 이르는 여정이 구원의 여정이고 광야의 삶이다. 이제 막 그 여정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건 아직 먼 이야기다. 이 모습은 하나님께 먹을 것과 마실 걸 구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구원이 아직 멀리 있는 사람이라 계몽하는 것이다.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러 가는 여정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는 존재라는 걸 드러낸다. 그리고 그건 단지 불평불만일 뿐 신앙이 아니라는 걸 말씀하신다. 오늘날 사람들이 세상의 법과 자기 힘으로 살다가 하나님을 믿겠다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이 어떤 신앙인지 설명한다.

 

먹고 마시는 일로 불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육신을 의지하는 신앙은 곧 불평하는 신앙임을 알게 하심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문제나 해결하는 신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 육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선행되어야 할 게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리스도로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 그 전에 육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다투는 건 모두 불만이고 불순종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은 이걸 설명한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가면 언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모두 해결하시고 공급해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또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서 살아가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를 잘 이루려면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함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노력으로 지켜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될 것이라면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실하고 노력하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것이고,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의 역량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육신의 생존과 더 나아가서 사회적 관념이 정의해 가는 삶의 수준과 편리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이유로 무조건 외면하고 터부시하는 건 어리석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생명이란 자체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활용하며 사는 존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 그듭난 생명,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살면 육신의 삶은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뜻대로 사는 존재가 될 것이며, 때로는 벅차 보이는 사회적 관념이 정의해 가는 삶의 수준과 편리는 먹고 마실 걸 구해야 하는 역경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가는 도화지로 여겨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생으로 보내신 목적으로 산다면 그 목적이 유효한 동안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공급하실 것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육신을 보존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기적처럼 공급하신 게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시는 이유도 그렇다. 죽어 썩을 육신에게 먹고 마실 것을 공급하면서 '내가 베푸는 은혜'라고 거드름 피는 하나님이 아니다. 먹고 마시는 정도가 은혜의 척도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은 육신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를 인생으로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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