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9:11-22) 단번에 드린 제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3. 31. 10:32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의 제사가 단번에 드린 제사라는 것은 상용구에 가깝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아들이 드린 제사기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렇게 알면 된다는 식이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다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닌 것은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그냥 믿으라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의 동의 없는 믿음은 믿음도 아니고, 어떤 것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을 이유로 믿는 것은 장사에 불과한 것이다. 즉 왜 단번에 드린 제사며 그것이 나에게 은혜가 되는지 모른다면 예수님의 제사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성경을 신학적으로 학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해롭다. 만민을 위한 복음이니 사람으로서 하나님 말씀이 이치에 맞고 자신이 수용하기에 적합하여 그 말씀에 마음이 동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은 그런 의도로 기록되었으므로 학문화하여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역으로 가는 것이므로 신학이 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문자를 아는 사람이 읽으면 알 수 있도록, 문자를 모르면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에 “그렇다(아멘)” 인정되고 자신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그것이 성경을 바로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사가 단번에 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이 한 번의 제사로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의미는 제사의 의미는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 밖에 없는 제사의 본질을 보이셨기 때문에 단번에 드린 제사가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레위 계통의 제사는 매번 드리고 여러 명이 드린 이유는 본질이 아니라 형식으로 드렸기 때문이다. 사과라는 유전자는 하나지만 그 사과라는 유전자가 표현된 종은 여러 가지고 한 사람의 DNA는 하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양한 모양과 세포로 나타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레위 계통의 제사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 형식을 본질로 보는 것이 그렇다. 오늘날 사람들이 세례 하나에 대한 생각만 해도 여러가지 인 것을 보면 그렇다. 세례의 본질은 하나인데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한 것이 바로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제사의 유일한 본질을 보이신 제사다. 이것은 두 번이 필요 없는 것이다. 단 번이라고 하니 여러 번 할 것을 한 번으로 퉁 친 것이 아니다. 그냥 그게 전부이기 때문에 한 번으로 드린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도 우리 자신과 인생 그것뿐임을 생각해 보면 된다. 우리의 인생이 한 번 뿐이고, 육신도 하나 뿐인데 우리 삶을 드리는 제사가 두 번이 될 수는 없다. 하나 밖에 없는 것을 한 번 드리는데 단 번에 드린다고 하는 것 외에 다른 표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삶이 아니라 제사라는 것을 드리려 하니 여러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삶으로 나타난 것, 삶에 부속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니 제사도 여러가지인 것이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가중치와 순위와 가치를 논하며 선후와 서열을 매기게 된다. 그것은 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에만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영역까지 그렇게 판단한다.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형식과 외식에서 왔으니 나타난 세상의 것을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번에 드린 제사라고 하는 것은 단지 횟수가 한 번이라서가 아니다. 유대인들이 수도 없이 드리던 제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다시 드리지 않아도 되니 단번에 드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고 본질적인 제사를 보였기 때문에 한 번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사람도 자기 삶을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으로 드리면 하나 뿐인 인생이므로 자신도 단번에 드린 제사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볼 때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