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3:18-25) 마지막 인사-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5. 21. 08:17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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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도 여느 서신서와 같이 문안과 기도의 부탁 그리고 동역자들에 대한 소식과 문안 등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한 가지 특이점은 마무리 인사의 끝까지 ‘인도하는 자’를 공경하는 것을 권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신앙을 권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이 가진 복음의 선하고 유익한 것을 권면하는 입장에서 그 권면을 잘 순종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서가 가진 특징을 고려하면 이는 묵상할 가치가 충분한 특이점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다며 시작한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단번에 드린 것이며 더 이상 사함을 위한 제사가 없다는 말로 그 또한 마지막이라는 것을 강조에서부터 묵상해보자는 것이다. 이 마지막은 기회나 시간적 개념으로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완성의 의미라는 점이 단초가 된다. 그것이 어떤 세계이든 목적이 완성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 세계의 목적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온전한 인도함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희생이 마지막, 아니 온전한 완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설명한 히브리서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한 구속으로 인도하는 사람에 대한 순종과 복종의 권면은 예수님이 단번에 이루시고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는 온전한 구속으로의 인도함이다. 


그리고 특별히, 아니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인도함, 죄사함을 위한 다른 제사가 필요 없는 온전한 제사로 이룬 구속의 세계는 이기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알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낮아지는 것이라는 아이러니 같은 반전이 복음의 비밀이다.


예수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가자고 하는 권면이 이것을 설명한다. 예수님의 능욕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자기 맘대로 정한 하나님 아들이란 기준과 다르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다. 그 능욕을 지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의로움은 의롭지 않은 자들에게 자기 육신과 그 수고를 내어주자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말로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라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옳은 것을 추구하고 나타내며 그것을 위하여 죽고 살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의는 의로운 것이기에 사람들의 그런 생각대로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는데 문제는 그 내용이 의로운데 죄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로서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염려나 의문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일 뿐,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이것은 하등의 의문이나 염려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그 생명의 본성이 바로 의로운데 죄인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본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인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모양으로 보니 의인이 죄인들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죄인을 구원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는 의로움을 가진 이가, 더 많은 것을 아는 이가, 더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자와 세계의 주장 앞에 죄인이 되고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하여 자기 육신과 그 수고와 가진 것을 내어주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능욕이고, 우리가 지고 갈 바인 동시에 우리를 인도한 인도함의 본질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전도의 본질이다. 세상에서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기 교회에 있는 성공한 사람, 성공한 기독교인들의 사례 등을 소개하면서 예수 믿었더니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된다는 것을 미끼로 교회에 와서 네가 바라는 성공을 빌어보라고 전하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고, 삶의 의미가 되기 위하여 육신과 그 수고를 내어주는 삶을 살아 “너의 그 모습이 하나님의 의였구나!”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 전도고 인도함이다. 


인도함이 이것이고, 이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 사이에 전해진 권면의 말씀이 이 히브리서다. 물론 확대해 보면 비단 히브리서 뿐 아니라 대부분의 서신서가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히브리서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인도함’은 전적으로 종이 되는 본성에 이끌린 삶의 모범이다. 예수님이 본이 되시고 표상이 되신다는 것은 그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열매고 맏아들이신 것이기도 하다.


인도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이에 순종하기를 권면하는 것이다. 인도함의 성격은 종이 되는 모범이고, 의로운데 죄인이 되어 육신과 그 수고를 내어주는 것은 본성을 인함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존재의 존재 목적에 수렴한다.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육신이라는 형식을 부여받은 존재다. 육신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그 의는 앞서 많은 설명을 한 것과 같이 의로운데 불의한데 육신과 그 수고를 내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아들이다. 그리고 아들이 나타났다면 아버지를 증거하고 그 성품을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 영광이고, 높은 곳을 사무하는 세상과 달리 낮아지는 것을 의로 여기는 구분이 있으니 거룩이다. 


결국 이 모든 법이 사람의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니 이것을 보이는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사람이 그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도 모르는 삶, 그것은 바로 사망의 자리다. 우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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